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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러기 May 09. 2022

엄마와의 싸움

모녀 여행

“어렸을 때는 잠투정이 심해서 그렇게 잠을 자지 않고 저를 힘들게 하더니, 지금은 어디서나 잘 자네요.”


지금도 난 아무 데서나 잘 자는 편은 아니다. 특히나 버스나 기차 같은 교통편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도통 잠이 들지 못한다. 엄마는 옆에 앉아 있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엔 집중해서 듣고 맞장구치기도 했지만,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이 되자 더 이상 엄마의 수다를 들어주기 힘들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전에 들었던 말의 반복이거나 아니면 나는 도통 관심이 없는 주제였다. 어느 순간 난 엄마가 말을 걸면 자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자는 척을 하다가 흘깃 엄마의 핸드폰을 보니 누군가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없는 몇 년 사이 엄마가 환갑이 되어 가족들이 엄마의 환갑여행을 다녀왔고 여동생이 결혼을 했다. 한국에 돌아와 고향집에서 며칠 머무르는 동안 엄마는 계속 내가 한국에 없어 집안 대소사를 하나도 함께 하지 못했다고 서운함을 비쳤다. 특히나 여동생이 결혼을 해서 가족끼리 여행을 가는 건 이제 어려울 것 같은데 내가 엄마의 환갑 여행을 함께 가지 않은 것을 많이 속상해하셨다. 딸이 평생 외국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직업인데, 그까짓 해외여행 다 같이 못 가도 나랑은 앞으로 쭉 가면 되지 뭘 그리 아쉬워하냐고 하자, 엄마가 “진짜지?” 하며 밝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난 내가 그 말을 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1년쯤 지나 이직하며 다음 회사를 입사하기까지 한두 달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 사이에 뭐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엄마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여행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너무 좋다며 전화기 너머에서 방방 뛰고 있는 엄마의 마음이 들렸다. ‘같이 여행 가자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엄마가 원하는 대로 여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고 싶은 곳 생각해서 다음날 말해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말할 때만 해도, 나는 3박 4일의 동남아 여행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스페인을 여행지로 골랐다. 어르신들이 스페인을 여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아서, 한참 어르신들 여행지로 스페인이 뜨고 있을 때였다. 프로그램의 여행루트를 보니 아무리 못해도 10일 이상은 필요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내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수 있으니,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보다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 스페인은 내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이기도 했다. 경유지인 네덜란드와 옆 나라 포르투갈까지 추가해서 2주의 여행을 계획했다.


엄마와 2주 동안 여행을 가겠다고 하니 다들 “쉽지 않을 텐데.”하는 반응이었다. 모녀 여행은 엄청 싸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랑 싸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와 엄마 사이는 평범한 모녀 사이와는 좀 달랐다. 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서울에 사는 할머니가 키워주셨다. 그때만 해도 서울과 나의 여수 고향집은 기차로 10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할머니 집에 사는 동안 일을 하는 엄마를 한 달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실 서울에 살 때 엄마의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첫 모습은, 여수에서 살기로 결정된 후 여수에 가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나를 엄하게 꾸짖던 모습이었다. 엄마와 10년 정도 살고는 서울로 대학을 가며 다시 떨어져 살게 되었다. 대학을 간 후론 엄마와 일주일 이상 같이 있어본 적이 없다. 유아 시절을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해서인지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아서인지 나는 엄마와 좀처럼 살가운 사이가 되지 못했다. 특별히 엄마와의 관계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지만 친구들처럼 엄마랑 팔짱 끼고 쇼핑을 가거나, 속엣말을 털어놓거나 그러지 못했다. 엄마랑 친해본 적이 없으니 싸운 적도 없다. 엄마와 싸. 운. 다라는 의미를 그때까지 난 이해하지 못했다.


내 기억의 엄마는 항상 강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삼 남매를 키워내셨다. 가족의 문제를 늘 척척 해결하는 든든한 나의 우산이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늘 도전하셨다. 그런데 함께 여행하는 엄마는 내 이미지 속의 엄마와 달랐다. 스페인 여행은 엄마의 첫 자유여행이었다. 그전까지 엄마는 2박 3일, 3박 4일 정도의 중국, 일본 패키지여행을 다녀와 보신 것이 다였다. 마찬가지로 나도 누군가를 챙겨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만나고 도전하고 경험하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나는 몰라, 나는 못해, 나는 싫어”만 반복하셨다. 아주 간단한 것에도 엄마는 내 이름만 불렀다. “화장실이 어디니? 이거 얼마니? 고맙다고 말해라. 물 좀 달라고 해라.” 처음엔 “엄마도 한 번 해봐”라고 격려하고 방법을 가르쳐주다가, 그 후엔 그냥 아무 대꾸도 없이 내가 해 주다가, 나중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화가 나고 속상하면 나는 조금 떨어져 있다가 감정을 누그러트리고 다시 대화하는 편인데, 24시간을 엄마와 붙어 있는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잠도 같이 자야 했다. 어렸을 때도 엄마랑 한 방에서 잔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시차 적응을 잘 못해 엄만 저녁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새벽 일찍 일어나셨다. 시차 적응을 빨리 하지 못하면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나지만, 초저녁부터 침대에 눕는 엄마에게 지금 자면 밤에 못 잔다고 소리 지르고,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는 엄마에겐 같이 자는 사람 배려가 없다고 핀잔을 줬다. 엄마도 처음엔 “미안하지만, 나는 못해, 싫어, 몰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다가, “못하는 걸, 싫어하는 걸, 모르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짜증을 내고 화를 내셨다. 우리는 점점 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그전까지 엄마에게 짜증을 내거나, 싫은 감정을 티가 나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학교 때 선생님이나 혹은 나이 차 많이 나는 회사 상사에게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엄마와의 사이가 변하고 있었다. 엄마와 싸우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밤새 보채는 애를 업고 달래다 출근을 했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제가 키워보려고 했는데 애 봐줄 사람을 도저히 못 구해 할머니에게 맡겼어요. 그러곤 할머니가 7년을 키웠네요. 애를 보러 갈 때마다 할머니 뒤에 숨어 제겐 오지 않더라고요.”


할머니에게 나를 그렇게 오래 맡길 생각은 아니셨다고 했다. 하지만 적적하신 할머니는, 엄마가 이젠 본인이 키우겠다고 해도 나를 보내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를 무척 좋아해 주셨으나 엄마는 너무 옛날 방식으로 나를 키운다고 생각하셨다. 유치원에 다녔지만, 내가 싫어하는 건 시키시지 않아 내가 가기 싫다고 하면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시고 편식 심한 나를 나무라지도 않으셨다. 두 살 차이 나는 동생보다도 키가 한 뼘이나 작았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한글도 깨치지 못하자 그때서야 할머니가 나를 보내셨다고 했다.


“여수에 겨우 데려왔는데, 제가 조금만 혼내도 방에 혼자 들어가 할머니를 찾으며 울더라고요. 그래서 전 딸을 혼내본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오고 나선 그래도 좀 가까워진 관계가 멀어질까 봐 애한테 소리 한번 지르지 못했습니다. 대학 간 후부턴 이야기할 기회도 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른 넘은 큰딸이랑 여행 와서 딱히 싸울 일도 아닌데 싸우고 있습니다.”


“3kg 밖에 안 되는 작은 애가 언제 사람 구실을 할까 했었는데.... 해외를 많이 다녀서 그런가, 그냥 척척 알아서 다 해냅니다. 패키지로 온 제 또래의 여행객들을 만났는데 딸 잘 만나서 저는 자유 여행한다고 딸 자랑을 엄청 했습니다. 우리 애가 이렇게 외국말도 잘하는 줄 몰랐어요. 처음 만난 외국 사람 하고도 막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있습니다.”


세비야의 한 여행지에서 엄마 또래의 한국 여행객들을 만났다. 엄마가 어찌나 수다를 떨던지 나는 창피했다. 아무래도 짧은 일정의 패키지여행보단 우리가 좀 더 여유롭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쇼핑센터 2곳이나 다녀왔다는 여행객들이 엄마에게 그 나이가 되어서도 자유여행을 할 수 있는 게 부럽다고 이야기하셨다. “난 엄마가 무슨 자유여행이야? 1인 가이드 쓰고 있는 최고급 패키지여행이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아니, 우리 딸이 이런 걸 알아와서... 우리 딸이 이거 해 보자고 해서... 우리 딸이 스페인어 잘해서 막 다 해결했잖아요.” 도대체 왜 엄마 이야기의 주어가 다 나인 건지 창피하기만 하고 자유여행을 한다는 엄마의 자랑이 결국은 딸 자랑임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면 하루 종일 한마디도 말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엄마의 메시지를 보며 깨달았다. 나는 스페인어로 길을 묻거나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주문할 때 말을 하기도 했고, 다정하게 맞이해주는 점원이나 웨이터와는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만나는 여행객들과 영어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거나, 때론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냥 옆에서 웃고만 있었다. 그게 얼마나 고역임을 알면서도 나는 엄마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생 말하는 걸 업으로 삼아온 엄마인데, 종일 꿀 벙어리로 있는 게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엄마, 뭐해?” 난 어색하게 잠이 깬 연기를 하며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는 깬 나를 반갑게 쳐다보면 또 이야기 한 보따리를 펼칠 준비를 한다. 물론 내가 이미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들어줘야겠다. 그 대화의 마지막쯤엔 나나 엄마가 서로에게 잔소리를 하다가 가벼운 싸움이 시작될 수도 있다. 그 싸움에도 당황스러워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싸우며 엄마와 난 조금씩 친해져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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