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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나 May 05. 2020

수술을 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던 순간

"지금 다연 씨 단계는 암이 되기 직전 단계예요."


다른 사람의 이야긴 줄 알았다. 암이라고?

언젠가 아이를 가지지 않을까 싶어 시작한 산전검사였다. 몇 가지 정밀검사를 한 것뿐인데.

상상도 못 했던 단어를 들은 것이다.


흰 메모지에 의사 선생님이 그린 일직선을 바라봤다. 선 위로 네 단계를 가리키는 세로선을 그리셨는데, 앞에 위치한 세 선은 아직 암이 아닌 단계, 그리고 당연히 마지막 선은 종착역 같은 암이 있는 자리였다.

결국 나는 3단계에 있다는 얘기고, 조심해야 할 정도가 아니라 하마터면 암이 될 뻔했다는 거다.


'자궁경부 상피내 이형성증'

메모지에 또박또박 써주신 병명이다. 그제야 첫 검사에서 세포 모양이 이상하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뭐가 잘못된 걸까. 어려운 이름 앞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있었다. 자궁 앞쪽에 작은 조직을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하다고.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나며 입원도 필요 없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근데 수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이처럼 눈물이 났다. 눈물이 계속 흘러나와 참을 새도 없었다. 이 나이나 먹고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저 무서웠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하시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가 않았다. 답이 없으니 앞을 쳐다보셨고 환자의 눈물을 발견하곤 자연스럽게 티슈를 건네셨다. 흔히 만나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다연 씨. 나쁜 생각은 일절 마세요. 지금 발견해서 너무 다행인 거예요. 아이를 가지고 발견했다면 중간에는 치료할 수도 없어서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어요."


이상한 날이었다. 매번 남편과 같이 오는 검사였는데, 그날만큼은 웬일인지 혼자 오게 됐었다. 오전 미팅이 생겨버린 남편에게 별일 없을거라 얘기했던 아침이었다. 그만큼 출근 전 가벼운 걸음으로 들린 병원이었는데 말이다.


분위기를 보니 이제 슬슬 나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울기 전보다 더 차분히 수술 날짜를 잡아주셨다. 습관 때문인지 업무 캘린더에 '수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을 넣었다.


멍한 상태로는 눈물이 계속 날 것 같아서 엉덩이를 들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진료실을 나가자마자 종이에 동그라미를 치며 입원 예약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남편에게 병명을 검색한 결과를 메신저로 보냈다.

"오빠 나 수술해야 된대요"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게는 산전검사를 받으러 간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들 자신이 없어서 결혼도 정말 신중한 나였다. 그런 내게 아이는 완전한 선택의 문제였고 출산을 위한 검사따위는 평생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한편으로 결혼생활이 내게 얼마나 안정감을 줬는지를 대변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된 탓이다. 함께 먹고 자고 노는 일상 속에서 '만약에 자식이 있으면~'이라는 가정법을 말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 정도 안정적인 환경이라면, 부모가 이렇게 행복하다면 괜찮겠지?라는 믿음이 점차 마음밭에 깔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직 조금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미리 준비할 건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겨우 출발선을 지났을 즈음이었다. 근데 암일 뻔했다니.



"혹시 이 수술을 하면 임신 가능성이 낮아지기도 할까요?"

진료실을 나가기 전, 내가 마지막에 떠올린 질문이었다. 평생 아이 가질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을 뱉어놓고선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전혀 영향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2-3개월이면 그대로 똑같이 생길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인터넷 검색해서 나온 내용은 절대 믿지 마세요."


단호하게 얘기하는 선생님이 고마웠다. 그녀의 단호함만큼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진료실을 나오는데 참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아이 생각도 없던 사람이 산전검사를 받질 않나. 내 생명도 왔다 갔다 하는 일 앞에서 내 몸의 하자로 아이가 생기지 않지 않을까 걱정하질 않나.


못하게 되는 것과 안 하는 건 이 정도로 무게가 다른 것인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바닥에 떨어진 빨래와 가방이 무색하게.


"진단서 받아올 수 있어? 아 그리고 오늘 회사에 휴가 내고 나랑 있자"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결과를 알렸다. 그에 남편이 보낸 첫 번째 메시지였다.


혼이 빠진 상태라 아마 그 말이 없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출근을 했을 참이었다.

회사에 얘기할게. 혜운 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는데 울컥. 참았던 눈물이 목소리에 맺혔다.


그걸 시작으로 화장실 앞 계단과 계단 사이에 있는 창문에 기대 한참 폰을 놓지 못했다. 검사 결과를 전하긴 해야 하는데 울지 않으려고 말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말을 하다 우는 건지 울려고 말을 하는 건지. 출근길에 이런 소식을 전한 것도 미안한데 반대편의 그녀도 울먹이는 탓에 더 눈물이 났다.


그 길로 어떻게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경비실을 지날 때마다 경비아저씨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는데 그 날은 만났는지, 인사를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현관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어제 읽으려고 꺼내 둔 구글 벤처스의 시간관리 책 <메이크 타임>이었다. 팀 전체가 같이 읽자고 사둔 책이었는데. 보자마자 말 그대로 헛웃음이 났다.


야심 차게 샀던 책이 한순간 얼마나 부질없는 종이 묶음이 됐는지. 죄 없는 책을 한 손에 집어 들어 괜히 멀리 떨어진 책꽂이에 넣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이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빨래를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남편은 가방을 벗어던지고 멍하니 있는 나에게 달려와 안아주었다.


"많이 놀랬지. 혼자 가게 해서 미안해"


미아가 됐던 아이가 오래 기다린 엄마를 본 것 같았다.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빨래와 가방이 무색하게.

서로를 안은채로 한참을 울며 서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수술을 잡고 돌아온 다음 날, 잠에서 깨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이런 감정은 이미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우주에 우리 아빠라는 자리에 구멍이 났는데 모두가 변함없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이 웃고 일하고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고. 계절도 그대로라 매년 똑같은 봄이 돌아왔다.


이상했다. 기둥이 뿌리째 뽑힌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가 기억났다. 병에 일자무식인 나는 암=죽음 같은 이야기였고, 암 직전 단계라는 결과는 그 문 앞에 서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혹시 지금 엔딩을 맺어야 한다면 너무 아까워서 심장이 아플 것 같았다. 이제야 뭐가 행복인지 알았는데. 사랑하는 게 뭔지 이제 알게 됐는데. 엄마가 되고 싶을 만큼 내가 좋아졌는데. 더 잘하고 싶은 회사와 좋아하는 동료들을 만났는데. 이 모든 게 한순간 사라질 수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일이 지난 날, 아빠가 꿈에 나왔다.

벌써 오랫동안 보질 못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누구지 싶었다. 차츰 그 얼굴이 익숙해지고, 평안히 자고 있는 그 사람이 아빠인 걸 알았다. 생전 모습이었다. 따뜻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떴다.


"오빠. 나 꿈에서 아빠 봤어" 기상 알람이 울듯 남편에게 말했다.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인터넷에서 해몽을 검색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집에서 편안하게 주무시는 꿈은 자신들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부모님이 깨지 않고 계속해서 주무신다면 오랫동안 복이 깃들 수 있음을 의미하는 길몽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꿈에 찾아온 아빠는 내게 길몽을 안겨주고 갔다. 나를 안심시켜주고 싶어 한 것 같았다. 본인이 평안히 자는 만큼 걱정하지 마라고. 다 잘 될 거라고.







2주 뒤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나 감기가 걸리면 수술이 미뤄져야 한다고 해서 요즘 우리 부부는 강제 집콕 중.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나보다 남편이 협조하는 게 더 힘든 일일 거라 생각해 더 씩씩하게 집에 붙어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감사한 게 많아졌다. 원래도 사랑 표현이 많은데 시도 때도 없이 남편과 친구들에게 고마움과 애정을 전하려 한다. 내가 받은 사랑과 도움이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더 나아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나눌 수 있을까 좀 더 크게 생각해보는 나날이다.


요즘은 날씨도 좋다.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불어 이제 밥을 꼭꼭 씹어먹듯 내 삶을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다.


아쉬움에 사무쳤던 순간을 기억하고, 인간사에 수많은 희로애락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를 기억하며 삶을 더 충만하게 살아야지. 순간순간을 더 진하게 살아야지.


이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일기를 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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