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에 우리말 자막켜는 이유 200529
1.
<멜로가체질>을 정주행했다. 주변에서 정말 많은 호평을 들었던 터라 한번은 꼭 봐야지 했던 jtbc 드라마다. 영화 <극한직업>로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같은 명대사로 재미를 선사하던 이병헌 감독이 만든 로코물이다. 줄거리는 서른이 된 드라마 보조작가, 다큐 PD, 드라마 마케팅 팀장 세 명의 베프가 겪는 연애와 사회생존이야기. 역시 대다수가 인생드라마라 꼽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3일동안 정신없이 이 드라마에 빠졌고 애정가는 작품 하나를 얻었다.
2.
16부작 내내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배경을 사용하거나 감동을 주려 죽자고 달려들지 않는게 좋았다. 대신 이 드라마는 정이 가는 친근한 캐릭터와 여유있게 무표정으로 쏟아내는 개그코드로 시청자를 자주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전략을 택한다. 무엇보다 이병헌 감독이 극본을 공동집필한 만큼 특유의 쫀득쫀득한 '말맛'이 일품이다. 그만큼 수다스러운 드라마다. 잔잔하면서도 피식대게 하는 그들의 티키타카를 듣다보면 어느샌가 한 캐릭터도 빠짐없이 내 친구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3.
나는 이런 '말맛'이 나는 드라마를 '독서형 드라마'라 부른다. 읽는 드라마라는 뜻인데 그만큼 영상보다 대사에 집중하며 시청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말과 글에 영감을 많이 받는 사람은 많이 공감할거다. 영상에 담긴 예술적인 미장센보다 꽂히는 대사 한 문장, 특정 표현에 더 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특히 책을 볼 때도, 다큐를 볼 때도, 지나가다 광고문구를 볼 때도 끄덕임을 주는 문자를 캡쳐해 따로 정리하는 나에게는 이런 독서형 드라마는 노동형 콘텐츠다. 감정에 일시정지를 선사하는 대사를 만날 때마다 매번 실제로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 기록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청 필수품은 한국어 자막. 드라마 문장수집에는 이렇게 좋은 툴이 없다. TV본방말고 자막기능이 되는 넥플릭스나 왓챠플레이로 자주 시청하는 이유다.
4.
물론, 처음부터 독서형 드라마를 한눈에 알아보기엔 어렵다. <멜로가체질>도 첫 화를 마치고 확신이 들어 2화부터 한국어 cc를 클릭했다. 판단 기준은 어떤 문장수집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이 문장들을 16부작까지 흘려보내고 잠이 올까. 아니면 영감을 받고 싶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게 수집할까.' 후자라면 식탁에 아이패드로 노션을 켜고 항시 대기를 한다. '쉬려고 보는 드라마인데 그냥 좀 즐겨'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같은 콘텐츠 홍수에 문장이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콘텐츠는 없고 나의 흐릿한 감정만 남기 마련이다. 증거는 간단하다. 이렇게 작업하기 전 왓챠에 기록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좋았다!' '재밌었다!' '다시는 안봄' 정도의 잔상만 남아있을 뿐이니까.
5.
특히 이 드라마는 제작팀이 작정하고 만든 독서형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타 드라마들과 달리 각 에피소드의 에필로그가 해당 회에 특별했던 대사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드라마는 대사가 핵심이오!' 라고 소리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여기서 소소한 재미찾기는? 내가 수집했던 대사들과 대조하기. 수집한 문장 중에 같은 것이 있으면 '아 요거 작가가 칼 같고 넣은 거구만' 하고 괜히 아는 척해본다. 거의 대부분 비슷했던 것보면 감독과 작가가 감동을 주고자 했던 시점과 포인트가 잘 워킹했던 것 같다.
6.
근데 나이가 들었나. 남의 연애얘기가 요즘 제일 재밌다. 하트시그널부터 멜로가 체질까지. 내가 요즘 통 이러니 어느 날 '그럼 우리도 연애하자!'고 외쳤던 남편의 출근길 포효가 잊혀지지 않는다. easy easy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