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기사님이 갑자기 미안하다고 했다.
데이나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매니저로 쓴 뉴스레터의 도입부를 전재합니다. 스얼 매니저들의 이야기는 매주 뉴스레터로 찾아가며 스얼 브런치 매거진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saletter
퇴근 후 달큰한 와인 한 잔을 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게를 나온 후 느껴지는 느닷없는 추위에 옷을 여몄어요. 늦은 시간에 춥고 몸은 무거워 얼른 집에 가고 싶더라고요. 마침 눈 앞에 택시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개인 기사처럼 딱 맞춰 도착한 차가 반가워 빨려 들 듯 몸을 넣었어요.
평소에 택시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요. 여느 여자분들처럼 기사님들과의 기억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타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에, 나름의 방어 방법 정도는 있습니다.
탑승하는 동안은 더 큰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사님의 기분을 맞춰드리거나 어떤 질문에도 뜨뜻미지근한 답변으로 응해 기사님의 흥미를 잃게 하는 방법인데요. 그날도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레 방어 기제는 작동되었죠.
“어디로 가세요?”
“OO역 주변인데요. 그쪽으로 가시면 제가 말씀해드릴게요”
“그냥 주소를 불러주세요. 찍고 가게요”
“아.. 뭐.. 근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OO역-XX역 사이에 횡단보도에 설 거예요.”
“주소를 불러주시는 게 편할 것 같은데”
“(그냥 포기하자) 네네. 무슨 동 몇 번지로 가주세요.”
이 정도쯤이야. '자기주장이 강하시네’라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차 안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정지 신호의 빨간 불빛 아래에서 들린 기사님의 한 마디가 정적을 깼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주소를 물어봐서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한 나머지, 무슨 말일까 하며 고쳐 앉았습니다.
“네?”
“아니 내 딸이었으면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주소를 안 말해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집 주소를 알리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요즘 같이 흉흉한 세상에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어디 사는지 알리겠어. 너무 내 편의만 생각했던 것 같네.”
예상치 못한 기사님의 반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평소 같지 않은 경험에 놀라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기사님의 배려심과 예민한 공감에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그냥 넘기실 수 있었을 텐데,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까지 전하신 거잖아요. 피곤했던 몸까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반성을 하고, 상대에게 인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일까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주소를 물어봐서 미안하다는 말'은 그렇게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뉴스가 전해주는 흉흉한 소식들과 그 속에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참 괴로웠던 요즘인데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최후가 그런 모습일 거라 생각해 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소를 물어봐서 미안한'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그들의 공감과 사과가 '상식'이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레터를 마치고 싶어요.
아. 오늘 레터가 길었죠. 미안합니다.
- 매주 반성할 일이 생겨서 큰일인 데이나 드림
스얼레터 169호 다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