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낭비되는 시간은 없다

by 더블유투자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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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서 학교 앞 고시원에 방 한 칸을 얻었다. 회계사를 준비하려면 이동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고 말이다. 사실 시험공부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길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눈칫밥 먹는 것이 싫어서 이를 핑계로 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책상과 침대 밖에 없는 비좁은 방이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찜통이고, 겨울에는 찬바람 쌩쌩 부는 공간임에도 마음 만은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비록 거짓말은 했지만, 오전 9시 수업을 한 번도 늦지 않았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한 성과 아닐까. 매일 늦어도 8시까지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그날 조간신문을 모조리 읽었다. 10개가 넘는 신문을 모두 공짜로 볼 수 호사를 누렸다.

과거 학교 이동시간에 지하철에서 신문을 정독하는 연습을 했던 것이 빛을 발했다.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10개가 넘는 신문의 경제면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활용해 경제 잡지도 읽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잡지까지 구독하는 것은 무리였는데, 이마저도 공짜였다. 게다가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었다. 꼭 읽고 싶은 신간이 나오면 도서관에 신청할 수도 있었다. 학교는 내게 천국이었다! 공짜로 너무 많은 것을 베풀어 줬기에 등록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수업이 다 끝나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꼭 CNN을 1시간씩 시청했다. 물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매일 영자신문을 읽었던 효과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모국어가 아니기에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1년이 지나고 약 50%가량은 알아듣게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하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실천에 옮긴 적은 처음이었다. 학점도 엉망이고, 회계사 준비는 하지도 않았고, 취업 준비를 위한 스펙 쌓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굉장히 불안했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뿌연 안갯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반대했고, 누군가는 의미 없는 시간이라 충고했다.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면, 강한 확신을 통해 밀어붙일 수라도 있다. 당시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행복을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니까, 마음이 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ll those days chasing down a daydream.
(헛된 꿈을 쫓아온 나날들.)

All those years living in a blur.
(희미한 것들 속에서 살아온 나날들.)

All that time never truly seeing.
(그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네.)

Things the way they were.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영화 라푼젤(Tangled, 2010) 중에서


영화의 남자 주인공 플린 라이더는 좀도둑이다. 왕관을 훔치고 이를 혼자 독식하려다가 라푼젤을 만나게 된다. 라푼젤은 평생 꿈꿔왔던 자신의 생일에 하늘로 날려지는 등불들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도와준다면 왕관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등불을 마주한 배 위에서 플린이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노래 속에 위의 명대사가 나온다. 물론 과거의 삶이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헛된 꿈을 좇아 희미한 속에서 살았던 일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라푼젤과 만나게 되었다. 좀도둑이 공주를 만나면서 인생역전을 한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지만 말이다.


현재의 인생은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축적의 시간을 거쳐 투영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NO!’라고 말하는데, 홀로 ‘YES’라 말하는 용기가 꼭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불안감은 안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를 더 희미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른 길로 가서 그 결과가 비록 실패로 끝날 지라도 이는 절대 시간낭비가 아니다.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경험의 시간이 축적되면 자신 만의 독창성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 만의 색깔이 세상에서 빛을 내는 시점이 찾아온다.


현재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40년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과거의 선택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아직도 미흡하지만, 경제의 흐름을 읽는 일로 밥벌이는 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축적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미래에 아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30년 먼저 세상을 살아본 아버지의 입장에서 뻔히 실패가 보일지라도 이를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시간낭비라 생각할지라도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굳이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인생의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는 말도 해주고 싶지 않다.


아무 의미 없다고 보이는 시간이 어쩌면 인생이란 탑의 탄탄한 바닥공사가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탄탄하게 인생의 탑을 쌓았다고 보이는 사람 중에 사실은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아슬아슬하게 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탄탄대로만 걸었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탑을 쌓는 과정에서 무너지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무너뜨려 본 경험이 축적되면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함을 갖게 된다. 우리 대다수는 탑의 높이만을 보고 이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인생은 길기에 성과의 높이는 언제든 순위가 바뀔 수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순간도 인생의 낭비가 아님을 아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인생이란 길은 꼭 지름길로만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 만으로도 성공적인 교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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