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t change nature.
(그게 자연의 이치란다. 네가 그걸 바꿀 순 없어.)
Change is nature, Dad.
The part that we can influence.
And it starts when we decide.
(자연이란 변하는 거예요, 아버지.
우리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어요.
그건 우리들이 결심하기에 달렸어요.)
영화 라따뚜이(Ratatouille, 2007) 중에서
대학교 4학년, 취업준비가 한창이었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름(?) 회사에 대해 알아보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러나 번번이 서류심사에서 탈락하니, 자신감을 점점 잃어만 갔다. 많은 나이, 좋지 못한 학점 등의 외부적인 요인을 탓하며 탈락을 자기 합리화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낙방으로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을 넘어 자기부정까지 이어지던 시기였다. 힘들어하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먼저 취업에 성공한 친구가 자기소개서 첨삭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무슨 자기소개서가 이러냐? 이건 사원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고, 사장이 되겠다는 거네.”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큰 포부를 담겨 있어서 민망할 정도다. 예를 들면 ‘현재 매출 4,000억 원대인데,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면 매출 1조 원을 돌파할 수 있고... 제가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 밀알이 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작성해서 냈다. 어처구니없는 자기소개서를 보면서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참 젊었구나! 그래도 패기는 살아있었네.’
그때 그 시절에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도전인데, 어쩔 땐 혈기로, 패기로, 허세로 가능하다 외쳤다. 안 되면 빠르게 포기할 때도 있고, 작전상 후퇴가 필요한 시점도 있다. 하지만 젊음이 무기였던 시절에는 그걸 몰랐다. 오로지 직진뿐이었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도전에 대한 불같은 열정은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세월이란 풍파에 깨지고, 넘어지고, 좌절해 봤기에 미리 지레 판단하게 된다. 경험이란 데이터가 축적되면, 굳이 해보지 않아도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촉이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리 한계를 단정 지어 버릴 수도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은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미리 한계를 결정지어 버린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 실패해도 그건 시간낭비가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험치가 절대적인 것 또한 아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이런 장면이 나온다. 생쥐인 아들이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를 꿈꾸며 인간의 주변으로 너무 가까이 다가간다. 이에 걱정이 된 아버지는 쥐약을 판매하는 곳으로 그를 안내한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덫에 걸린 쥐를 전시해놓은 쇼윈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쥐는 쥐답게 살아야 하고, 인간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이렇게 될 수 있다 경고하면서 말한다.
“이게 자연의 이치란다. 네가 그걸 바꿀 순 없어.”
“자연이란 변하는 거예요, 아버지. 우리가 노력하면 바꿀 수가 있어요. 그건 우리들이 결심하기에 달렸어요.”란 명대사를 남기고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난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자신의 오랜 경륜을 토대로 보면, 생쥐가 요리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0.1%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자식의 행보가 답답하기만 하다. 아들이 쇼윈도의 전시된 다른 쥐들처럼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자연의 이치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들은 도전을 택한다. 성공의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스스로의 결심과 노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부모가 되기 전, 젊은 날의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 자식은 부모의 경험을 토대로 실패하지 않았으면 한다. 계속 성공만 맛보면서 기복 없는 순탄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그러나 분명 미래의 어느 순간에는 뻔히 실패가 예상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택하는 자식의 뜻을 꺾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뒤에서 속앓이 하며, 응원만 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넌 할 수 있어, 넌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무슨 말을 해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응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30년 먼저 태어나 살아본 아빠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결말이 뻔할지라도 말이다. 아이에 능력의 한계를 미리 규정짓고 싶진 않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알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빠의 경험치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줄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