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록과 지혜
함께 중년이 된 아내와 대화 시간을 늘려가는 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내 나름대로 지켜왔던 자존감의 한켠에 아내의 폭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싸우고, 뒤끝 없는 부부생활을 이어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수년에서 십 년을 넘고, 십 년을 넘어 이십 년을 넘는 햇 수를 거듭하면서 서로에게 쌓여온 과거는 어느 순간 '의리'라는 미명아래 살아온 건 아닌가 되짚어 본 적이 있다.
부부에게 의리? 아니다. 부부에게 의리란 없다.
부부에게 의리? 아니다. 그런 건 없다. 돌아서면 남인 게 요즘 시대다. 통계적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들 아리라. 우리 주변에 갈라선 부부가 그리 많다는 사실을. 내 주변에도 두 손가락으로 셈하지 못할 정도로 차고 넘친다. 다만 '사랑'에서 '정'으로 바뀐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난 '신뢰'라는 믿음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이것도 사랑이라 하면 사랑이다. 의리보다는 '신뢰'가 더 중요하다. '신뢰'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난 어디에서, 어떻게, 무언갈 하더라도 그 과정과 결과가 '좋은'느낌이라면 생각나는 사람. 그게 '신뢰'이고 이 '신뢰'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이 배우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집의 한켠에서 자리를 비우고, 독선의 많은 부분을 무너뜨려야 하고, 거짓말은 쓰러뜨려야 하며, 마음의 반 이상을 비워 그에게 주어야 한다. 반쪽에게 비워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신뢰'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람의 공간에서 공존하고 공명한다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신뢰'다.
결국은 대화
신뢰를 쌓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대화'다. 그 어떤 물질적 대안보다 중요하다. 아니 이것 외엔 대안이 될 수 없다.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은 거들뿐. 그 안에 존재해야 하는 가치의 근거는 대화여야 한다. 이십 년 훌쩍 넘겨 아내와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그렇다. 대화가 거듭될수록 쌓인 것은 우리라는 관계다. 우리라는 관계가 중년이 되는 동안 켜켜이 쌓였던 우리 사이의 신뢰가 되기까지 가장 중요했던 방법을 했다면 대화를 늘려가는 것이었다. 내 결론은 그렇다.
대화를 늘려가는 기회요인으로 여행도 있고, 영화감상도 있으며, 자녀에 대한 진중한 주제, 사람의 관계 그리고 믿지 못할 순간에 대한 공감의 시간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있어왔다. 그중에도 요즘엔 이 '드라마'라는 게 자주 등장하곤 하는데 일부러라도 아내가 보는 드라마를 함께 보는 편이다. 함께 보지 못한다면 플랫폼 기반으로 콘텐츠 유통에 대표선두주자인 OTT를 통해 언제든 감상하는 시간을 평행할 수 있어 좋다. 동기화하지 못한다면 비동기 방식으로라도 먼저 인터벌 달리기로 트랙을 한 바퀴 돈 아내를 위해, 나는 전력 달리기와 지속주(정주행?)로 아내의 곁까지 달릴 수 있다.
드라마
아내와 같은 드라마를 같은 시간대에 소비한다는 건 여러 모로 좋은 면이 많다.
시대의 트렌드를 함께 이해할 수 있어 좋다. 엠지세대가 무엇이고 그들의 주요 마인드는 무엇일지, 판타지는 주로 어떤 소재를 다루며 왜 각광받는지,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의 헤게모니 싸움은 왜 일어나고 요즘엔 어떤 소재가 어떤 오해로 싸움을 일으키는지, 국가적 대표들이 왜 그리 못난 티를 내는지, 추정이더라도 왜 샤머니즘을 거론하는지.
때론 좀 더 들어가 본다. 드라마 소재와 플루트와 등장인물에 대해, 역사적 고증에 대해 다양한 소재와 미장센은 어떠한지, 중국의 동북공정 전략에 소비되는 피해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 등장인물과 조연의 케미는 어떠한지. 각본에 없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이런 시간을 통해 신혼생활 전 그 불꽃 튀던 연애 시절에도 몰랐던 또 다른 아내의 자아를 만난다.
선과 악
재벌집의 막내아들이 환생인지 영혼의 이동인지, 환혼이라는 드라마가 영생인지, 치얼업을 우리 딸이 왜 좋아하는지, 슈릅의 어떤 면이 동북공정의 피해소재이지만 김혜수의 입술은 그 모든 이슈를 삼켜버렸는지 뱉었는지, 천 원짜리 변호사는 왜 매일같이 수임을 위해 달리면서도 그녀를 못 잊는지, 월수금화목토의 주요 거주지가 다운힐 하는 내 라이딩코스이자 우리 동네의 어떤 빌리지촌에서 벌어지며 그들이 왜 매일 못 만나 안달인지 등 지난 한 해만 되돌아보더라도 함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아내와 드라마 소비의 호흡을 함께 했던 듯싶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그중 '환혼'은 시리즈 두 편이 꽤 가까운 인터벌을 벌였는데 내가 놓진 시즌 1은 넷플릭스를 통해 정주행으로 전력 질주 했다. 시즌 2 트랙으로 재빠르게 달려오라는 아내의 가이드도 보급식으로 떠 먹히며.
미술관에서 당신의 마음작은
미술관에서 기획전이든 정기전이든 어떠한 조각전이든 간에. 항상 당신의 동선 중 발길을 잡아 다음 발걸음을 떼 놓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 있지 않았던가? 그게 당신의 마인드에 흐르는 음악의 뮤즈다. 그게 당신의 오늘 마음작이다. 드라마도 이런 장면이 있다. 잊지 못할 등장인물의 눈물과 표정연기. 그리고 그의 혼신이 담긴 한마디 한마디가 뇌리에 남아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잊지 못하는 장면. 내겐 '환혼 시즌2: 빛과 그림자'의 이 장면이 그러했다. 이 장면의 대사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SNS에서 나와 띄동값(?)도 훌쩍 넘는 어르신으로부터 이 장면을 다시 조우했다.
잊히지 않는 대사.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는 여러 명대사 중 하나다. 그리고 왜 그러한지 내 나름대로 고심해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기억'은 하지만, '악'에 대해서는 '회피'로 '기록'하거나 '기억'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악은 자신의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의 끝에서 소멸할 것이다'라는 자위적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인 듯하다.
그 자위적 믿음.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악의 행적'도 기록하고 '기억'하고 왜 그래서는 안되는지 후세에 남겨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선의 영향력에 대한 의지를 투영하곤 하는데 그게 그 믿음 때문에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많은 문장들을 어떤 명언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했다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명언의 근원이 신채호 선생인지, 링컨인지, 처칠인지 모른다. 다만 하나는 명확하다. 모두가 생각하는 상식선에서의 소화 가능한 진리라는 것. 지식의 품앗이에서 끝나서는 안되며, 지혜로 남겨 모든 이들이 기억할 수 있는 선으로서의 기반을 역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오늘도 대화하자
이 잊히지 않은 대사에 시민민주의식, 정의와 공정에 대해 깊은 고심 트랙을 지속주로 달리는 분이 다름 아닌 '아내'다. 요즘은 평행으로 그녀의 곁에 말을 섞기에도 내 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는 수준. 아직 더 공력이 필요하다. 그녀와 '대화'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