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와 나의 부조화를 견뎌내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군대 훈련소에 있을 때,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뭐."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격이 있을 때, 종합 평가 시험이 있을 때, 행군이 있을 때, 화생방이 있을 때, 특기를 배정 받을 때, 어떤 큰 과업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마다 그것에 대해 앞서 걱정하면서 투덜거리고 있는 동기들에게 나는 쉽게 내뱉듯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말했다. 훈련소 동기들은 그런 나를 보고 긍정적이라거나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아마도 나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본성이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너무 비관적인 사람이라는 고백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중얼거린 것은 내가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든 변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행군이나 화생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탈영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일은 성실하게 닥쳐오게 되어 있었다. 나는 불가항력에 가로막혀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낙관적 비관주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겪는 일로 예를 들자면, 아마도 비행기 사고와 같은 것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사고가 난다면, 기체 결함으로 인한 사고 상황에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순간에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때에도 아마 나는 훈련소에서 그랬듯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낙관의 의미인가.
아니다, 살고 싶지만 나의 무력함 앞에서 무너진 채, 겨우 옲조리는 것일 뿐이다. 한숨을 내쉬면 한없이 작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 대신 못이기는 척, 그렇게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역을 하고 나서, 복학을 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어떻게든 되겠지'를 찾곤 했었다. 하지만 전역 후 내가 만난 세계에서는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낙관론을 가장한 비관론은 무용하다. 매번 마주하는 문제들과 선택지들은 그렇게 눈 딱 감고 흘러가는 대로 맡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들이 아닌 것이다. 군대에서는 단 하나의 정직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의 시계는 흐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되고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나는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러한가? 물론 많은 세상의 일들도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은 군대와 달리 '제대'라는 것이 없어서,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과 나를 완전히 분리시켜 주지는 못한다. 대체로 하나의 문제가 불완전하게 해결된 채, 의외의 순간에 새로운 문제와 결합되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어떻게든 ... 어떻게든 ...' 을 중얼거리며 나 자신을 기만하고는 했었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차라리 “어떻게든 되겠지”가 아니라 “될 대로 되라고 해” 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이라도 지녔다면, 고민이 좀 덜 했을까. 훈련소에서부터 유예시켜왔던 고민들이 이제야 그 책임을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위의 글은 내가 군대를 갓 전역하고 복학을 한 후, 자취방에서 눌러앉아 했던 고민을 갈무리했던 메모였다. 페이스북에 대충 끄적였던 옛 메모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보았던 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https://youtube.com/shorts/IGWZy9mlg9g?feature=share
알고리즘의 인도에 의해 스쳐지나가듯이 보게 된 또래 배우의 말에 나는 나의 고민이 얼마나 치기 어린 고민이었던 것인가를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어려울 건 없습니다. 해내야죠."
평생을 기악을 해온 이들을 연기하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려울 게 없는가? 아니다.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태도와 노력일 것이다.
박은빈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재작년에 내가 정말 열렬히 시청했던 <스토브리그>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력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이러한 진지하고 열성적인 자세가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또한 내가 '낙관적 비관주의'라고 이름 붙였던 삶의 태도를 생각하며 모았던 세상에 떠도는 말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유대 경전 주석지 '미드라시'에서 나온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확치는 않다.)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 ( 1984년 삼성 라이온스와의 한국시리즈 당시 롯데 자이언츠 감독 강병철 감독과 故 최동원 선수의 대화)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 김훈, 『칼의 노래』 서문 中)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윤동주, 「참회록」 中)
그 때 당시만 해도, 나는 이런 글들을 보며 나의 낙관적 비관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이것은 차라리 체념의 다른 말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이 체념에 대한 변명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제 이 글들은 새롭게 읽힌다.
이 글들은 작가들이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비로소 낙관적 비관주의를 버리고 과분하고 거창하지만 새로운 이름을 붙여보고자 한다. '비관적 낙관주의'라고.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차마 체념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것을, 나는 그렇게 불러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세계와 나의 부조화를 견뎌내는 하나의 방법이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