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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읽기의 괴로움

-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고

by 고전파
김현_행복한_책읽기.jpg 김현, 『행복한 책읽기』 표지,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꼭 마주칠 수밖에 없는 두 거목이 있다. 바로 故 김윤식 선생과 故 김현 선생이다. 두 거목은 한국 문학의 메시와 호날두처럼 서로를 의식하면서 연구를 하기도 했고, 때로는 협력을 해 책을 내면서 한국 문학사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불모지와 같았던 한국문학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로 남았을 것이다.


이 공간에서 서평을 올리는 카테고리의 이름도 '책읽기의 괴로움'이다. 김현 선생의 전집 중 한 권의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행복한 책읽기』와 짝을 이루는 책이기도 하다.


문학을 애호한다고 하면서도 김현 선생의 글을 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이건 나름의 변명이 가능한데, 김현 선생의 전집은 현재 절판이 된 상태다. 현재에 그나마 구할 수 있는 책은 이 『행복한 책읽기』와 『사라짐, 맺힘』 정도다. 전집 중에서 일부는 중고로 구해 가지고 있지만 글자가 작고 종이가 변색되어 읽기 어렵다. 절판된 전집이 개정판으로 재출간되기를 희망한다.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 선생의 유작이다. 작고하기 전 써둔 독서 일기다. 글을 읽어나가면서 선생 특유의 문체에 놀라고 배우면서 읽었다. 이를테면, '아, 알겠다.'나 ‘놀라워라.’와 같은 소위 ‘김현체’라 불리는 표현들과 잘 모르거나 사용해보지 않은 표현들을 배웠다. ‘말주정’ 같은 표현이 특히 재미있었다.


이러한 배움과는 별개로 이 책 안에서 내가 즐겁게 읽은 부분들은 대체로 동료 문인들과의 대화나 일화를 담은 부분, 그리고 개인적인 고뇌를 담은 부분에 있다. 김현 선생과 동시대 문학에 대해 담은 부분들은 나로서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그 작가나 작품들을 잘 모르는 탓이 클 것이다.


예를 들어, 시인 박남철이 사과를 세 알 들고 방문했다는 일화(1987.6.22.)나 동아일보에서 시인 기형도의 부고 소식을 본 일화(1989.3.7.)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달 전에 그와 같이 술 마실 때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울고 싶은 듯, 찡그리고 싶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묘한 표정이었다. 아니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단 말인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혼자 영화를 보다 죽다니!

1989.3.7


그러나 어떻든 한 젊은 시인(기형도)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1989.6.6




김현_평론가.jpg 평론가 故 김현




나를 충격하는 대목도 많았다. 김현 선생의 다른 책 『사라짐, 맺힘』에서 본 '로댕'에 대한 생각과 비슷한 대목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단 하나도 버리지 못해서 모든 걸 망쳐버린다.



분석은 분석을 벗어나는 것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바보들만 하나도 안 버리려다가 다 버린다.

1986.12.12



그(로댕)의 조각은 두 개의 유형으로 대개 가를 수 있다. 하나는 미완성 조각들이다. 창작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작의 어느 순간에 이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는 절망감에 에술가가 사로잡히는 경우가 수다하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 경우에까지도 제작을 밀고 나가 작품을 망쳐버린다. 로댕은 그러나 그 순간에 제작을 끝내버린다. 거기서 제작을 끝냄으로써 그는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제작의 어려움까지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 김현, 『사라짐, 맺힘』, 279쪽.




두고 두고 새겨야 할 대목들을 남겨둔다. 30여 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도 이 구절들은 동시대의 사람들, 특히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 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떄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구조는 그렇게 많지 않겠지만.

1987.2.11


지라르의 욕망 이론은 지식인들에겐 일정한 매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이야말로 책에서 읽은 대로 살려고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애를 쓰고 있으며, 자기가 전범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경쟁자로 변하는 것을 거의 매일 눈앞에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읽은 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중개의 집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경쟁자로 등장하는 날의 절망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식인으로서는 그 두 체험이 다 같이 고통스러운 체험이며, 피하고 싶은 체험이지만,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제자로서 나는 스승을 모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 안 그러면 그에게 증오심을 느낄 테니까 – 스승로서의 나는 제자들의 모방이 불가능한 곳에 가 있으려고 애를 쓴다. - 안 그러면 그에게 경쟁심을 느낄 테니까! 끔찍한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식 계층의 삶이다.

1987.3.19


갑자기 떠오른 오규원의 말 한마디: 시인 지망생에게는, 이 시가 왜 좋은가보다는 이 시가 왜 나쁜가 말해줘야 한다. 그래서 선생은 감탄할 줄을 모르게 되나 보다!

1987.11.18


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1988.7.17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의 사람은 투사고 뒤의 사람은 종교인·예술인이다. 나는 항상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부심 없이는 싸울 수 없고, 나는 항상 잘못한다라고 사유하는 사람의 원죄성이 없이는 느낄 수 없다.

1988.8.8


비평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급해지거나 게을러진다. 둘 다 좋지는 않은 태도이다.

1989.3.9


시평은 문체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감탄보다는 미문에 더 의존하고 있다. 잘못하면 기술자가 되겠다. 조심해야 할 단계이다. 더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더 고통해야 하는데, 그의 고통은 자꾸만 제스처로 느껴진다.

1989.4.9.


너는 동양 정신에 침투되어 있다. 아니 아니…… 어떤 의미로는 그렇고 어떤 의미로는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런 말도 해서는 안 된다. 글은 읽은 자의 몫이다. 너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1989.9.2.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198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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