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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인풋과 아웃풋

- 김성중의 「상속」을 읽고

by 고전파
2018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jpg 2018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성중 작가의 「상속」을 읽었다. 2018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며, 김성중 작가의 단편집 『에디 혹은 애슐리』에 실려있는 단편이다.


소설 속에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이십 대의 젊은 작가이자 선생님, 그리고 그 선생보다 나이 많은 제자 기주, 그리고 또다른 제자 진영. 교모세포종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선생은 자신의 책을 기주에게 남겼다. 그리고 췌장암이 재발한 기주는 그 책을 진영에게 맡기려고 한다. 단단한 상속의 연쇄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선생은 기주에게서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그리고 격려한다. 하지만 현실에 맞닥뜨린 기주는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다. 결국 글을 쓰고 소위 글밥을 먹는 것은 진영이다. 진영은 기주와 선생을 떠올리며 재능에 대해 생각한다.



참으로 잔인하고 신비로운 일이 아닌가. 아무리 참담한 슬럼가에도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아이들이 태어난다. 인구가 많으면 그중 몇 퍼센트에게는 반드시 예술적 재능이 발현된다. 재능이 삶을 낫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삶 쪽에서는 재능을 펼칠 기회를 주지도 않으면서 퍼부어주는 것이다. 이런 재능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 김성중, 「상속」




재능이 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쉽게 답할 수도 있고, 또 쉽게 답할 수 없기도 하다. 이를테면,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처럼, '그냥 생겨났고 존재해왔다'는 식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재능을 찾아내고 벼리고, 그리고 올바른 목적을 찾아 쓰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답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선생은 재능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데, 이 부분이 마치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제법 일리 있는 대답처럼 읽힌다.




선생은 ‘우선 감격하고, 그다음에 공부한다’는 대목은 힘을 주어 두 번 읽었다.

(…)

“소설을 어떻게 쓰는 건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여기에 서 있지만 저는 작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작가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재능은 일종의 스피드가 아닌가 하는. 대표작까지 도착하는 속도가 좀 더 빠른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더딘 사람도 있겠지요.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작품이죠. 저는 비교적 빨리 등단해 책을 냈고 소설로는 먹고살 수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창작을 하는 한 여러분과 제가 크게 다른 입장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뭘 가르칠 수는 없을 겁니다. 소설은 일종의 번역입니다. 나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 그런 인식은 차가운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완전히 압도당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우리에게 격렬함이 필요해요. 플롯이니 문장이니 하는 건 집어치우고 이것부터 시작하자고요. 한 번이라도 이 뜨거움에 데는 게 목표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래야 저 스스로 사기꾼처럼 여겨지지 않을 테니까요.”

- 김성중, 「상속」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요즘 들어 떠올린 재능에 대한 생각과 결부되는 느낌을 받았다.


예술에 있어서 재능의 여부는 손쉽게 판단된다. 결과물을 보는 즉시, 미추의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잠재적인 발전 가능성을 알아보는 일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꽤 긴 시간동안 이러한 예술의 재능은 아웃풋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왔다. 이를테면, 조각상, 회화, 음악 등 감상자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창작자의 재능이 판별된다는 의미다.


아웃풋은 인풋에서 ‘+α’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인풋의 복제에 불과하다. 또한 알파의 형태는 표현, 주제, 형식 등 전방위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나며, 같은 인풋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알파를 만들어낸다. 이것을 곧 “영감”이라거나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웃풋의 ‘퀄리티’는 인풋의 양, 퀄리티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듯이 보이나, 인과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하여, 동일한 양이나 수준의, 혹은 그 몇 배에 달하는 인풋을 해야 한다.’, 같은 정량적인 규정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존재할 수도 없다. 다만 어느 정도의 인풋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정성적인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테면, 아주 적은 인풋을 가지고도 더 많은 양의 아웃풋을 뽑아낼 수 있는 예술가들이 존재할 것이며, 또한 일종의 기교와 기술로도 일정 수준까지 아웃풋을 생산해 내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재능이 활동하는 영역은 아웃풋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재능은 어디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까?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도입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근래에 도달한 생각은 이렇다. 재능은, 창작자 내면에 존재하는 블랙박스의 성능이다. (그 내면의 구체적인 좌표는 주로 뇌와 가슴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블랙박스’의 주요 작용은 이렇다. 인풋이 유입되고 이를 소화시켜서 아웃풋으로 배출하는 것. 다만 또다시 추상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이 안에서 어떤 기제가 작용하는지는 명명백백히 밝혀내긴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주 많은 양의 인풋으로도 적은 양의 아웃풋밖에 건지지 못할 때도 있고, 적은 양의 인풋으로 대량의 아웃풋을 쏟아낼 때도 있다. 그리고 같은 인풋으로도 두 예술가가 서로 다른 아웃풋을 생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블랙박스의 성능은 선천적일 수도 있으며 꼭 그만큼 후천적일 수도 있다.

이제 다시 「상속」의 선생님의 말로 돌아가 보자.



소설은 일종의 번역입니다. 나의 인식이 더해진 세계에 대한 번역.




이 문장은 인풋과 아웃풋, 그리고 블랙박스의 역할을 간단하고 깔끔하게 정의 내린다. 여기에 더해 선생은 특별한 조건을 덧붙인다.




완전히 압도당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그런 경험이 필요해요. 우리에게 격렬함이 필요해요. 플롯이니 문장이니 하는 건 집어치우고 이것부터 시작하자고요. 한 번이라도 이 뜨거움에 데는 게 목표입니다.





이 뜨거움은 마치 블랙박스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연료처럼 들린다. 예를 들어, 같은 작품을 보고도 누군가는 감동만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누군가는 스스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정체 모를 충동에 휩싸인다. 그 사람의 내면 안에 잠들어 있는 블랙박스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재능의 차이는 어떨까. 당사자인 살리에르에게는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살리에르 증후군’이라는 말은 재능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상속」의 선생은 재능의 차이에 지레 겁을 먹을 수강생들의 우려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미리 못 박는다.




재능은 일종의 스피드가 아닌가 하는. 대표작까지 도착하는 속도가 좀 더 빠른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더딘 사람도 있겠지요.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작품이죠.








결국 도돌이표일지도 모르겠지만, 결론은 이렇다. 재능은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압도적으로 빠른 처리 능력의 블랙박스를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아주 느린 처리 능력의 블랙박스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 둘의 재능에 대한 판단은 아웃풋으로만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그건 한 창작자의 생애에 완전히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 되어버린다. 스스로 재능없음을 미리 한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겁을 먹지 말자.

일단 격렬한 뜨거움을 찾아 헤매자.

그 뜨거움을 연료 삼아 블랙박스에 불이 들어온다면,

아주 천천히 블랙박스를 가동시켜보자.


한평생에 걸려서 단 한 작품만 – 장르는 상관없다, 소설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 만들어 낸다고 해도 괜찮다. 괴테도 『파우스트』를 쓰는데 일생을 바쳤다.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jpg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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