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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인 줄 알았던 아내가 북한 간첩이었던 건에 대하여

- 권혁일의 『첫사랑의 침공』을 읽고

by 고전파
권혁일 첫사랑의 침공.jpg 권혁일의 『첫사랑의 침공』(안전가옥)





첫사랑은 슬프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 가혹한 진실을 퍼뜨린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우물에 독을 푼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련하게 간직한 첫사랑이 있다.

그 첫사랑은 같은 반 친구일 수도, 학교 선생님일 수도, 아니면 대학 동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체로 첫사랑은 잘되지 않는다.



설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연인이 된다고 해도,

서툰 청춘의 시기를 거치면서 끝내 헤어지고 만다.

그래서 모든 첫사랑은 가슴 아프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첫사랑이 지구를 정복하러 오는 외계인이라니?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얼탱이가 없어서 실소부터 머금게 만드는 이 설정은 권혁일의 소설집 『첫사랑의 침공』의 표제작에 나온다. 『첫사랑의 침공』은 「첫사랑의 침공」, 「세상 모든 노랑」,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하와이안 오징어볶음」 총 4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첫사랑의 침공




어느 날 갑자기 DMZ에 인류에게 비우호적인 UFO가 착륙하고, 한국은 예비군마저 소집해 전투 태세를 갖춘다.

이미 군 생활을 끝냈건만, 예비군마저 끌려 나오는 진짜 전시상황이라니!

전선을 향해가는 트럭 안에서 모두 죽을상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주인공 성윤만은 다르다.


드디어, 6년 전에 훌쩍 떠나간 첫사랑 서고 누나를 만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신 나간 희망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서고는 성윤이 고백을 하려는 찰나, 떠나버렸다. 자신은 사실 지구를 침공하려는 외계인이라면서.


아! 오스카 와일드가 그랬던가?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이길 원하고,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길 원한다.”




서고는 성윤에게 첫사랑이면서 동시에 끝사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선에 가는데 온통 서고 생각뿐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서고는 여자와 남자 같은 인류의 하등한 분류법이 통하질 않는 외계인이 맞다.




세상 모든 노랑



「세상 모든 노랑」은 '노란색의 신'과 노란색만 볼 수 없는 인간 '영'의 사랑 이야기다. 두 사람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각 계절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노란색에 이름을 붙여가며 사랑을 키운다.


이들의 노란색 사랑의 결말은 이미 예견되어 있다. 신과 인간의 사랑은 마치 첫사랑 같은 것 아닌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으니 말이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그건 파국이라고 숱하게 증언해왔다.


하지만 모든 이별이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첫사랑이 평생 기억에 소중하게 남듯이,

어떤 이별은 남은 삶을 살아갈 추억이 되기도 한다.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은 익숙한 배경과 뜬금없는 장소를 뛰어다니는 개구리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빠에게 버림을 받은 서현과 외계 행성에서 홀로 태어나 수천 년을 살아온 외로운 외계인 메로의 사랑 이야기다.


우주에서 가장 빠른 우주선으로 평생을 달려도 못 닿을 거리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소통을 하게 되고 끝내 만나게 된다. 스스로 외톨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십 억개의 은하를 건너서라도 만나러 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진실은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우주만큼 거대하다.


그들은 과연 북극에 갔을까?


아마도 갔을 것이다. 그건 0%보다는 높은 확률이니까.





하와이안 오징어볶음





「하와이안 오징어볶음」은 이 소설집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앞선 세 작품에서 인간과 인외의 사랑을 다룬 작가는 스리슬쩍 인외의 자리에 북한 간첩이라는 평범한(?) 인물 민정을 넣어놓는다. 하지만 민정의 남편 정훈은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 민정이 외계인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외계인인 줄 알았던 아내가 북한 간첩이었던 건에 대하여, 랄까?


사실 민정은 자신의 사수였던 철태를 사랑했고, 정훈과는 당의 지시로 인해 결혼했을 뿐이었다. 철태가 도망친 후, 민정에게 자신이 있는 하와이로 오라고 연락을 취한다.


이제 정훈만 죽이고 하와이로 가면 된다!


하지만!

이 철없는 남자가 요리한 평범한 맛의 오징어볶음 냄새가 자꾸 민정의 발목을 잡는다!


모든 사람이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평범’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범’해지는 일조차 ‘비범’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작가가 왜 이 작품을 마지막에 넣어두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저 평범해지기를 바랐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와이안 오징어볶음.jpg 하와이안 오징어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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