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는 시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nter flush Dec 20. 2023

내 탓이요!

나를 사랑하는일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빠 친구분의 권유로 우리 식구는 이전에는 없던 종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함께 성당에 다닌 기억이 없고(나중에 군대 다녀와 영세를 받았으니 오빠도 신자) 언니는 중등부에 나는 초등부에 예비자로 입교식을 하였다. 당시 어린이 미사와 만화영화 '캔디'가 같은 시간이어서 늘 망설여야 했는데, 미사에 빠지면 죄를 짓는 듯한 마음과 만화영화의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성당은 열심히 다녔다. 주일만이 아니라 때론 평일에도 마음이 힘들거나 고민이 생기면(무슨 고민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추운 겨울 세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 성당에 도착해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곤 했다. 어두운 조명과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사이로 소수의 사람들이 침묵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배경으로 나 또한 숨을 죽이고 눈을 감고 간절히 뭔가를 빌었다. 무슨 고민이었을까?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 추운 날 미사 시간도 아닌, 교리도 없는 평일에 성당을 찾을 용기를 내었을까? 그렇게 가끔 홀로 성당을 찾아 웅장한 침묵과 고요를 마주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차분하고 정렬되는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성당의 봉사활동으로 초등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는데, 교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교리 연구를(연구는 짧고 뒤풀이는 길었지만) 하고, 미사 시간 성가 반주를 하며 제법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내 신앙과 믿음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을까? 지금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종교가 있는지 물어보면 여전히 가톨릭이라고 말하는데(곧이어' 지금은 안 나가고 있어요'라고는 하지만) 나의 믿음은 성당을 열심히 나가던 그 시절보다 더 나아진 것도 같다.  성당의 전례 의식 중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세 번 치는 부분이 있는데, 늘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되뇌다 어느 날 문득 이 외침은 사랑의 메시지 임을 깨달았다.

언젠가 지인과 이 이야기를 나누다 도대체 왜 다 내 탓이냐며 자신은 동의할 수 없고 내 탓으로 돌리는 데 화가 나서 성당에 안 나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전혀 들을 귀를 열지 않아 당시 내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없었는데(전달하는 내 능력 부족이었을 것이다) 나의 깨달음을 그녀도 알아채면 참 마음이 편할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긴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왜 '내 탓'이 사랑의 메시지인가?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하는 많은 사람들.

한바탕 남 탓을 하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면 달라지는 건 험악한 인상뿐이다. 한가득 불만을 품은 마음이 찌푸린 미간과 팔자주름을 깊게 패이게 할 뿐 해결되는 건 없다. 남 탓은 그들의 문제다. 그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 왜 내 시간을 들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들의 문제를 논하는가(그런다고 바뀌는 게 없는데). 특히나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말이다(대놓고 하는 경우도 있다만). 무튼 남 탓이라고 부르짖는 일 안에는 알게 모르게 내 탓이 어느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아도 모른 척 내 탓은 별것이 아닌 듯 슥 감추고 남 탓만 소리 높여 주장하면 그 스트레스는 온전히 내게 돌아온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스트레스가 내 몸에 이로울 리 만무하다. 긍정의 기운을 조금만 끌어다 적은 지분이라도 내 탓으로 시선을 돌리면 째푸렸던 인상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풀리며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과 관용마저 생긴다. 이것이 어찌 나를 위한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그러니까 미사 시간 늘 부르짖던 '내 탓이요'의 화두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일깨워 준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날! 머릿속에 전구가 번쩍 켜진 느낌이었다. 남 탓은 이해와 용서가 쉽지 않지만 내 탓은 이해와 용서가 어렵지 않더라.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말이다.

내 탓으로의 시선은 나를 성장시킨다.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힘을 키우고 스스로를 개선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캔디 만화의 유혹을 무릅쓰고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 의미도 모른 채 성당에 다니던 꼬마의 정성은 무척 의미가 있던 일이었다. 제대 위의 작은 불빛과 숨죽이며 기도문을 외우던 어른들 사이 조용히 간절하게 뭔가를 빌던 나의 그 시절이 문득문득 큰 힘이 되어 지금의 나를 세우곤 한다.



삶은 평생의 대화다.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의 나와 대화를 이어가고 호흡을 맞춘다.

타인들에 비춰 보이는 나를 마주하고 부족함을 채우고 모난 부분을 다듬는다.

그렇게 평생 나와의 대화를 잇는다.

내 탓을 발견할 때가 성장 포인트다. 알아야 다듬고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내 안에서 발견되는 나를 만나며 모르던 나를 알아간다.

시간이 걸리고 더디 가더라도 그렇게 조금씩 성장한다.


나를 사랑하는 일.

내 탓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어제의 나와 화해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