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차스키의 흔적을 찾아
일본을 처음 여행한 건 95년 겨울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의 아득한 기억이다. 그때 처음 교토를 가보고는 정갈하고 단정한 거리와 일본 고유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그곳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었다. 그 진한 기억 때문일까? 일본에 가려하면 늘 교토로 발길이 향하는 것은..
차를 좋아하고부터는 교토를 가게 되는 일이 더 늘어났다. 교토의 가온 거리를 걸으면 잠시 시간을 거슬러 시간여행자의 기분이 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옹기종기 줄은 선 낮은 목조 건물들은 일본 고유의 옛 모습을 마음껏 상상할 자유를 주지만 결코 그 안의 모습은 비치지 않으려는 듯 은밀한 기운을 흘리고, 호기심과 단절감이 교차하는 그 거리의 매력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쉽게 가시질 않는다. 내가 교토로 자꾸 발길이 향하는 건 이런 끌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마이코 복장을 하고 화장을 짙게 한 여인들을 간혹 만날 수 있는데 처음엔 실제 게이샤나 마이코를 본 줄 알고 놀랐지만 알고 보니 대부분 관광객들이 마이코 분장을 하고 거리를 걷는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게다를 신고 따각거리면서 걷는 그 모양새가 어설프게 보였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부끄러운 듯 또 조금은 과시하는 듯 의식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즐거운 마음으로 비춰졌다. 짙은 화장과 올린 머리 그리고 기모노의 화려함은 채도가 낮은 그 거리에 화사함을 안겨주었다.
게다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걷다 보니 커다란 강이 눈 앞에 펼쳐졌다. 카모 강이다. 좁은 거리를 벗어나 확 트인 강을 맞는 시원함은 소멸과 생성의 교차점을 마주한 듯 일순간 담아내기 힘든 광활함으로 눈에 닿았다. 좁음과 넓음의 대비로 순간 눈과 마음의 적응 시간이 필요했고 불어오는 바람과 지는 석양의 하늘 빛깔이 마음의 추스름을 도와주었다. 서서히 강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 아랫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앉아서 쉬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들리고 어디선가 반주 없는 일본 노래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시원한 강바람을 다고 들리는 단조 가락의 구슬픔은 기대 없는 기다림을 노래하는 듯 건조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음에 어떤 슬픔이 차 있기에 저런 울림이 새어 나오는 걸까?
멀어지는 노랫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마음의 선을 그 리듬에 맞추며 조금 더 걸었다.
산조 거리와 테라마치 거리가 만나는 곳에 다다르니 반가운 루피시아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차의 향기가 진하게 울리는 그곳이 반가워 그 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마음이 쉴 수 있는 아늑함과 따스한 온기로 그곳은 내게 잠시의 쉼을 허락한다. 매장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루피시아는 지역마다 한정 블랜딩 차를 팔고 있는데, 그 지역에 가야만 살 수 있다는 은근한 유혹은 한정 홍차의 얄미운 매력이다. 교토에 왔으니 교토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 차가 무엇인지 살핀다. 몇 가지 종류의 차 중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닿은 건 화사한 기모노를 입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우수에 찬 눈빛의 게이샤 그림이 인상적인 '카라코로'다. 카라코로는 게다의 따각거리는 소리를 표현한 말이다. 교토를 가장 잘 표현한 홍차란 생각에 머뭇거림 없이 집어 들었다.
차를 집어 드니 예전에 본 롭 마샬 감독의 '게이샤의 추억'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가난 때문에 팔려가 열다섯이 되기 전까지 마이코로 힘든 시절을 견뎌야 했던 한 여인의 애환이 담긴 영화. '게이샤는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가질 순 있어도 사랑만큼은 선택할 수 없다.'는 영화 속 대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그녀들의 운명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비장하게 들린다. 짙은 분장 속에 꾹꾹 숨겨진 그녀들의 슬픔이 느껴졌던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아서 골든과 카잔차키스, 그들의 눈에 비친 게이샤와 일본의 신비는 그들에겐 낯선 나라였을 이 섬나라 일본으로의 발길을 부추겼나 보다. 짙은 화장 뒤에 숨겨진 고독과 진한 슬픔, 그리고 꺼낼 수 없는 홀로의 사랑이 느껴져 그녀들의 미소는 오히려 슬프게 다가온다. 카잔차키스가 그녀들을 인터뷰하며 인생의 기쁨을 물으니 되돌아온 대답은 슬픔뿐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을 그곳에서 구원해 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던 여린 여인들의 삶에서 어두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을 카잔차키스의 안타까운 표정이 그려진다.
동그란 틴에 그려진 화사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의 핏기 없는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니, 그녀의 꼭 다문 입술은 결코 모든 걸 말할 수 없는 지난한 과거를 삼키고 있는 듯 침묵의 화려함만을 품고 있다. 교토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차를 우리려 틴을 열고 안에 든 봉투를 집어 들어 향을 맡으니, 문득 목조건물 사이를 비집고 걸으며 보았던 가온 거리에서의 느린 풍경과 카모강가에서 불어오던 한 줄기 바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기억 사이로 찻잎에서 올라오는 향기가 이어지는데, 코끝을 맴도는 첫 향은 매화향이다. 자신의 마음이 고요에 머물 수 있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매화향. 그 그윽한 향기가 맘속을 파고든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 차가운 기운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의 여린 강인함은 게이샤 그녀들의 삶을 닮았다. 찻잎을 덜어내니 찻잎 사이사이 매화꽃이 핀 듯 팝콘이 들어앉아 있다. 찻잎에 팝콘을 넣을 생각을 하다니 그들의 재미난 상상력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찻잎 사이 투명하게 빛나는 네모 조각들은 슈가 큐브다. 자잘한 꽃봉오리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이 녀석들은 히스플라워이고, 매화향 뒤로 유자향이 슬며시 따라 올라온다. 고혹한 아름다움 안에 화려하고 달콤하고 앙증맞기까지, 어린 마이코와 농염한 게이샤의 매력 모두를 찻잎에 담아내었다. 화려한 블랜딩 후에 느껴질 차의 맛이 살짝 걱정되기도 했는데, 우리고 마셔보니 수렴성 없는 깔끔한 맛에 이내 안심이 되었다.
은은한 향은 마시는 내내 사라지지 않는다. 다 마신 후에도 여운은 길게 남아 마음에 닿은 채 사라지지 않는 건 차의 향 때문일까, 맛 때문일까, 여인들의 지난한 삶의 향기 때문일까...
찻잔 주위를 맴도는 향에 마음은 잠시 교토의 뒷골목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 골목 어딘가에서 서성거렸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선도 느껴본다. 숨 막히게 살았던 여인들의 지친 시간들과 고단한 삶의 무게가 은은한 매화 향에 묻혀 잔잔하게 마음에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