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샀다

by 겨울밤

감정적으로 꽤나 힘들었던 8월. 후덥지근한 날씨와 여름의 공기가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작년 이맘땐 새 집으로 이사하고, 한층 넓지만 아늑해진 공간에 행복했었지. 그런데 그게 불과 1년만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다니! 특히 둘이 같이 머물던 거실에 앉아 있으면 함께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어 우울감을 증폭시켰다. 퇴근 후 집에 가기 싫어 숙소를 잡기도 하고 주말이면 서울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도피들도 잠시 숨을 돌리게 해 주었을 뿐. 근본적인 치료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어릴 적 배웠던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아보기로 했다. 음악만한 위로는 없고, 연주하는 순간의 몰입이 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잡념으로부터 날 구원해 줄 것만 같았다. 손 끝에서 나오는 음정에 감정을 담아 내보내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기도 했다. 그 길로 집 근처 피아노 학원을 알아봐 3개월치 수업료를 냈다. 5회치의 심리 상담료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상담만큼, 아니 어쩌면 상담보다 더 가치가 있을 듯해 거침없이 결제했다.


8월 말 첫 레슨을 받았다. 건반이 친숙하면서도 낯설었지만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악보 보는 방법도 (특히 낮은음자리표의 음계나 음표의 박자들이) 가물가물 했지만 악보를 들여다 볼 수록 조금씩 익숙해지더라.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며 떠오르는 감정들은 건반에 흘려보내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르곤 했다. 그렇게 레슨일 외에도 거의 매일 피아노 학원 연습실에 출석한지 일주일. 이쯤 되면 피아노를 구입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한밤중에도 마음이 답답할 때 기댈 수 있고, 업라이트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더라도 연습실을 오가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을테니. 거실 한 켠의 피아노가 공간의 분위기를 바꿔줄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다리와 덮개 없이 건반만 있는 저렴한 입문용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하려 했으나, 반려묘 이슈로 건반을 보호하는 덮개가 있는 콘솔형이 아니면 안 되었다. 결국 예산 대폭 상승시켜 100만원 초반을 상한선으로 잡고 리서치를 시작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만큼 주변과 어우러지도록 흰 색이었으면 했고, 타건감보다는 음색에 중점을 두고 선택했다. 아무리 업라이트와 '유사'한 타건감이라 할지라도 똑같기는 어려울 듯 싶었고 둘 다 만족하기 어렵다면 음색에 가장 초점을 두고 고르라는 친구의 조언도 한 몫 했다. 그렇게 추린 후보군은 가와이 KDP120, 코르그 C1 air, 예산은 많이 벗어나지만 야마하 YDP165. 고가의 물건이니 한번쯤은 건반을 두드려 보아야 할 것 같아 퇴근 후 낙원상가로 향했다. 코르그는 취급 지점이 거의 없어 결국 실물을 보지 못했고, 야마하 YDP165는 음색이 마음에 들었으나 가격이 예산을 너무 벗어나 탈락시켰다. 가와이 KDP120과 후보에는 없었지만 사장님이 잘 나간다고 추천해주신 롤랜드 RP107를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롤랜드는 중저음은 풍부했으나 고음부에서 영롱하기보다 직선적인 느낌이 강했고, 결정적으로 흰 색이 없어 탈락. 가와이는 타건 후 건반 복원 시 살짝 흔들림이 있어 출렁이는 느낌, 가볍다는 후기가 많았지만 생각보단 덜 거슬렸고 듣던 대로 음색이 아름다웠다. 새끼 손가락이 짧아 쉽게 피로가 오는 내 손의 특성상 오히려 가벼운 건반이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좋을지도. 낙원상가의 매출 상승에 기여하고 싶었지만 택배로 1-2주, 알아서 조립을 해야 한다는 말에 쿠팡으로 주문을 넣었다. (쿠팡을 덜 쓰고 싶어도 자꾸 그 편리함에 손을 들게 된다.)


로켓배송으로 유명한 쿠팡답게 황송하게도 일요일 아침, 주문한지 24시간도 안 되어 기사님이 방문해주셨다. 미리 점찍어둔 창가 자리에 피아노를 두고 가구 배치를 바꾸니 다시금 새 집으로 이사한 것 같은 기분. 테이블을 90도 틀고 그릇장을 다른 벽면으로 옮겼을 뿐인데 공간이 훨씬 포근하게 느껴졌다. 환하게 흰 피아노와 위쪽으로 붙여둔 푸른 강릉 바다 포스터, 창가에 걸린 초록빛 디시디아까지 아늑한 나의 거실 한 켠. 몇 달만에 처음으로 집에 머무는 게 평안해졌다.


거실에 피아노가 들어온 지 어느덧 보름. 매일 피아노 앞에 앉은 덕분에 재입문 1개월차 치곤 그럭저런 친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이 좋다. 악보와 씨름하다 보면 음악다운 음악이 내 손 끝에서 나오는 것도, 그 음악이 나 자신을 다독여주는 것도 신기하다. 디지털 피아노가 주가 되다 보니 학원의 업라이트 건반이 너무 묵직하게 느껴지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그래도 내가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잘 치고 싶어서 보다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기 위해서니까. 큰 지출이었지만 좋은 소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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