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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산 Sep 05. 2021

무 쓸모 day

가장 쓸데없는 것을 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우쿨렐레를 잡았다. 띵, 띡, 띡. 소리가 경쾌하지 않지만 어눌하게 손을 놀려본다.      




 ‘정직, 성실’ 학교 숙제로 가족 신문을 만들어오라는 말에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아빠에게 물었을 때 아빠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던 두 단어. 한 치의 고민 없이 말씀하셔서 나는 어른이 되기 전까지 가훈이란 집안 대대로 물려오는 성경 말씀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어쨌든 가족 신문 오른쪽 위에 연필로 ‘가훈 : 정직, 성실’이라고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후로 어린 나는 그걸 마음속에 두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정직은 모르겠지만 꽤 성실하게는 살았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성실이란 곧 시간을 아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건 곧 죄악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좋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인생이 끝장날 것만 같은 (잘못된) 생각이 전방위적으로 나를 압박해왔다. 수첩에 그날 해야 할 공부를 적고 10분 단위로 쪼개 공부할 내용을 적었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달려야 한다.’와 같은 문구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에 붙여 놓았다. 시험과 관련 없는 일을 하면 마음에 가책이 느껴졌다. 가령 책을 읽는 것이나 취미생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의 수다 같은 것들. 이 시간이면 문제를 몇 개 더 풀 수 있는데. 죄책감을 느끼면서 독서를 했고 그런 시간조차 고3이 되면서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무사히(?)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버릇은 고치기 힘들다. 성실의 진짜 뜻은 어디론가 휘발되어 버리고 나 스스로 정의한 성실, 즉 ‘효율적 인간으로  생산적으로 살기’가 나에게 끈끈하게 붙어있다. 다이어리를 사서 그 달에 할 일, 그 주에 할 일, 하루에 할 일을 나눠 적는다. 휴일도 예외는 아니다. 쉬어도 스마트하게 쉬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해야 할 일 들을 적어두고 도장 깨듯이 휴일을 쉰다. 해외여행에 가면 한국 사람은 쉬지를 못하고 빡빡한 일정을 다 소화하고 지치듯 돌아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그런 사람의 표준모형이 있다면 바로 나일 것이다.      




 그런데 효율적 인간으로 살다 보니 문제가 있다. 할 일은 해도 해도 생긴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것. ‘생산적이지 않은 일’은 저 후 순위로 밀리게만 된다. 그리고 보통 생산적이지 않은 일, 즉 돈벌이가 안되거나 눈에 보이는 자기개발과 관계가 없거나 당장 가까운 미래에 성과가 눈에 보이는 일들이 재미있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중에 해야 하는 일을 우선으로 살다 보니 하고 싶은 일은 계속 뒤로 순서가 번번이 밀린다.      



 일주일에 하루를 ‘무 쓸모의 날’로 정했다. 이 날 만큼은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다. 모든 해야 하는 일은 뒤로 미룬다. 무엇할지 미리 적지 않는다. 그냥 마음에 떠오르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쓸데없는 걸 우선순위로 한다. 일단 우쿨렐레를 잡아본다. 하면 할수록 느낀다. 내가 정말 음악에 소질이 없는 건 확실하구나. 그래도 유튜브를 보며 낑낑대며 손가락을 꺾어 현을 눌러본다. 띵- 하고 울리는 소리보다 띡-하고 탁한 소리가 더 많이 나지만 즐겁다. 곰 세 마리 노래를 이렇게 열심히 불러본 건 또 처음이다. 홍대 여신이라도 된 듯 양 정성껏 우쿨렐레 반주에 맞춰 동요를 불러본다.      



 시집을 보기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나 부동산, 주식 이야기가 아닌 시집을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있었나. ‘시’는 국어 시험에서 밑줄 친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화자의 마음을 고를 때 읽거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지루할 때 어쩔 수 없이 읽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시집을 사다니. 신기하게도 시를 읽으면 그 시를 가만히 음미하게 되고 상상하게 되고 그 안에서 소설보다도 더 풍성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무엇보다도 말들이 너무 아름답다. 게다가 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비효율적 인간’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 중 (이 와중에도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방점은 ‘글쓰기’에 찍혀있다. 글을 써봤자 뭐 하냐.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 널렸는데. 내가 이슬아가 될 것도 아니고 김영하가 될 것도 아닌데. 돈 한 푼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냥 편하게 살지? 아우성대는 내 머릿속의 보수파를 뿌리치고 글을 써본다. 쓰다 보니 재밌다. 재밌으니 됐다. 게다가 완성된 글 한 편은 뿌듯함까지 선물한다. 내가 꽤 멋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에 딱 좋다.      




 ‘무 쓸모의 날’의 가장 큰 수확은 내 마음에 신경 쓰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해야 하는 것은 머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뭘 하고 싶은지는 마음을 가만히 바라봐야만 알 수 있다. 원하는 걸 해주면 마음이 기뻐하는 게 느껴진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때의 뿌듯함과는 또 다른 결의 기쁨이다. 요즘은 쓸데없는 걸 하는 시간을 평일로도 늘렸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평생을 달려왔는데 이제 멈춰 서서 쓸모없는 걸 하는 시간을 익히려 노력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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