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제철 음식이라는 말을 알게 되면서부터 김치도 제철 음식인 것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철마다 다른 김치를 집에서 만들어 먹었기 때문이다. 초겨울 김장철에는 배추 포기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봄에는 파김치, 초여름에는 열무김치와 오이소박이를 먹었다. 엄마와 외가 식구들은 지금도 계절마다 외할머니 밭에서 나는 재료로 김치를 담가 서로 나눈다. 나에게 김치는 제철 음식이며 엄마와 외가의 음식에 대한 고집과 가족의 끈끈함이다.
김장철이 있는 이유는 그즈음의 배추와 무가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수확물로 1년의 김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수년의 경험을 거쳐 김장의 김치는 배추 포기김치, 무청김치, 동치미가 되었다. 포기김치에 비해 무김치 종류(무청김치, 동치미)는 최상의 맛을 유지하는 기간이 짧다. 무가 금방 짜게 되거나 물러버려서 못 먹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김장 후 무청김치와 동치미를 먼저 익혀서 먹는다. 무청김치는 면 종류(라면, 국수)와 짝이고 동치미는 고구마와 짝이지만 국수를 말아먹기도 한다. 포기김치는 어떤 반찬과도 잘 어울리지만, 생김치 그대로가 맛있으면 역시 슴슴한 국물이 생각난다. 잔치국수와 떡국이다. 우리집에서는 깍두기를 따로 만들지 않고 배추김치에 무를 손바닥 반만 하게 썰어서 배추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다. 배추 사이에서 잘 익은 무를 베어 물 때의 시원함은 깍두기에 댈 게 아니다.
김치 명인의 김치를 안 먹어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입에는 우리집 김장 김치가 가장 맛있다. 재료를 허투루 쓰지 않기 때문에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때가 되면 외삼촌이 외할머니 밭에 배추와 무, 기타 부재료들을 심으신다. 농사가 잘 안 되거나 직접 키우지 못한 것은 이웃에서 농사지은 걸 산다. 고춧가루는 외할머니가 이웃에서 농사지은 햇고추를 사서 마당에서 말리고 방앗간에서 빻아오신다. 새우젓은 광천 새우젓 시장의 외할머니 단골 상점에서 최상품 육젓을 사온다. 매실청과 멸치액젓은 작은 외숙모와 사촌오빠가 직접 만든 것이다.
수년간 식구들의 선호도에 맞추어 레시피도 바꿔왔다. 시원한 맛을 선호하는 식구들의 입맛대로 설탕을 적게 넣고 젓갈을 많이 쓴다. 개운한 맛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김치소도 적게 넣는 편이다. 해가 바뀌고 한겨울에 잘 익은 포기김치를 꺼내면 깊은 김치 향이 올라온다. 도마에 송송 썰며 한 조각 씹으면 모 김치냉장고가 광고하는 것처럼 톡톡 쏘는 맛이 난다. 며칠의 집약적인 노동과 김장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합동 김장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사 먹는 김치로는 대체할 수 없는 맛이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였나,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 댁에서 이모들과 모여 합동 김장을 하기 시작했다. 4~5년 전까지도 배추 200포기씩 했는데 이제는 100포기만 한다. 시기는 11월 셋째 주다. 둘째 주는 배추와 무에 맛이 덜 들고 넷째 주는 추워서 밭에서 배추나 무가 얼 수도 있고 일하기가 힘들다. 본격적인 김장은 목요일에 배추, 무, 마늘, 생강, 쪽파, 청갓 등 모든 작물을 뽑는 걸로 시작한다. 그 다음날은 수확물들을 씻고 다듬고, 부재료들을 양념에 투입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날 밤부터 배추와 무를 절이고 밤새 뒤집는다.
여기까지는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합류하는 날이 다르다. 일찍 가면 그만큼 일을 많이 하게 되지만 그 누구도 비난이나 원망을 하지 않는다. 일을 적게 하려고 늦게 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아빠와 내가 직장에 다닐 때는 금요일 밤에나 시골에 내려갈 수 있었다. 외할머니 댁에 도착한 밤 아빠와 나는 이모들이 잘라둔 무청과 뽑아둔 마늘을 엮어서 집 뒤켠에 걸어두었다. 무청은 말라서 시래기가 되고 마늘은 몇 달에 걸쳐 외할머니가 하나씩 뽑아 쓰신다.
모두가 모인 토요일 새벽부터 절인 배추를 헹궈 널어 마당 한편에서 물기를 뺀다. 된장국을 끓여 아침을 먹고 무채를 썬다. 이모들은 입을 모아 아빠가 하면 무채 길이가 일정하다며 아빠는 무채도 잘 썬다고 칭찬한다. 손재주가 그만인 아빠는 채칼 위에서 무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무채 길이를 맞추신다. 무채를 썰고 남는 위쪽의 파란 부분은 1.5cm 정도 두께에 손바닥 반 만한 크기로 썬다. 배추 사이에 끼워넣기 위함이다. 잘 익었을 때 시원한 맛이 깍두기에 댈 게 아닌 그 무 조각이다.
무채, 파, 청갓,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새우젓, 멸치액젓, 매실청, 설탕, 새벽에 쑤어 식혀둔 찹쌀풀을 섞는다. 초등학생 두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깊은 대형 다라이*에 김치소를 버무리기 시작한다. 버무리는 것은 아빠의 몫이다. 다라이가 크고 깊어 키가 크고 팔이 긴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치소가 완성되면 아빠는 마당으로 나가 물기 빠진 절인 배추를 집 안으로 들여오신다. 막내 이모는 문간에 자리 잡고 그 배추 윗동을 다듬는다.
(* 다라이: 잘못된 표현이지만 대체어 대야로는 그 어감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그대로 쓴다.)
이제 내가 할 일이 생긴다. 김치소를 머금을 준비가 된 절인 배추와 김치소를 이모들과 엄마의 작은 다라이에 배분한다. 각 집에서 가져온 빈 김치통을 분간하고 썰어둔 무 조각을 빈 김치통 맨 밑에 몇 개씩 던져 넣어 이모들과 엄마 옆에 줄 세운다. 이모들과 엄마가 속을 채운 배추를 김치통에 한두 층 쌓을 때마다 나는 배추 사이사이에 무 조각을 몇 개씩 끼워 넣는다. 각자의 다라이 속 배추와 김치소의 양을 보고 리필도 한다. 꽉 찬 김치통의 가장자리를 페이퍼 타올로 닦고 뚜껑을 닫아 한쪽으로 옮기는 일도 있다.
동그랗게 앉아 김치 속을 채우면서 생산적인 토론을 시작한다. 올해의 배추와 무를 품평하고 절인 정도와 염도는 어땠으며 작업 과정이 매끄러웠는지를 돌아본다. 믿을 수 있는 농작물과 제대로 된 재료에 대한 칭찬을 하며, 어깨 아파 허리 아파 하면서도 이 가내수공업을 지속하는 이유를 확인한다. 그 이후에는 근황 토크다. 외할머니의 손주들(나와 내 사촌들) 대부분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고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저지레 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의 어린 시절도 소환하여 웃는다.
배추김치를 끝내고 점심을 먹는다. 배추 양이 많으면 늦어질 때도 있다. 시내에 사시는 큰 외숙모가 돼지고기를 삶아오신다. 겉절이를 무치고 아침에 끓인 된장국과 막걸리를 곁들인다. 이 맛에 노동을 지속할 수 있다.
점심상을 치우고 나면 무청김치가 기다리고 있다. 원래는 알타리김치를 담갔지만 뿌리(무) 부분보다 잎(무청) 부분을 선호하는 식구들의 식성 때문에 무청김치로 바꿨다. 무는 크기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큰 무는 무채, 그 무청은 시래기가 되고, 중간 무는 저장되어 겨우내 무조림, 뭇국 등으로 변신한다. 중간 무와 작은 무의 무청은 억세지 않아 작은 무와 함께 김치가 되기에 알맞다. 무청이 무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총각무를 따로 심지 않는 것도 장점이고, 육질이 단단하고 알싸한 맛이 남는 알타리에 비해 작은 무는 덜 단단하고 시원하고 단 맛이 난다. 엄마와 이모들은 절인 무와 무청을 한 입에 들어갈 크기로 자른다. 먹는 이를, 혹은 먹을 때를 고려하여 일하는 이들은 수고로움을 감수한다.
무청김치까지 끝나면 김장은 끝난다. 아빠와 나는 고춧가루 범벅인 모든 그릇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 씻어내고 마당에 널어 말린다. 엄마와 이모들은 집안 청소를 한다. 분업 체계가 확립된 지 오래, 모든 과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루어진다.
모든 김치는 한두 통씩만 서울로 가져와 먼저 익혀 먹는다. 나머지는 통에 손주 이름을 써서 외할머니 댁 뒤켠 그늘에서 자연 바람으로 익힌다. 외할머니가 중간중간 열어보시고 익은 정도를 알려주신다. 날이 갑자기 추워진다고 하면 외할머니를 살필 겸 누군가가 내려가 김치를 실내에 들여둔다. 그리고 김치가 적당히 익으면 각자가 외할머니 댁에 들러 각자 분량의 김치를 가져가서 김치냉장고에 장기 보관한다. 최상의 재료로 만든 김치를 최고의 정성으로 익혀 궁극의 맛을 즐긴다. 기술이 발전하여 김치냉장고가 최적의 숙성점을 찾는다고 해도 자연의 솜씨는 따라갈 수 없다.
매년 김장하러 가면 100세를 목전에 둔 외할머니가 미리 담가 두신 동치미가 있다. 내가 기억을 시작한 시기부터 항상 그랬으니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부터 그러셨을 것이다. 어른 무릎 높이 정도의 큰 통으로 서너 통을 담가서 두 통은 아빠에게, 나머지는 다른 자식들에게 나눠주신다. 동치미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위에게 특별히 많이 할당하신다. 아빠는 외할머니께 별 일이 없어도 한 달에 한두 번 가서 할머니 댁 잡일을 하고 오신다. 대부분 엄마랑 같이 가지만 엄마랑 일정이 안 맞으면 혼자도 가신다. 번지르르한 말보다 일상과 취향을 살피는 따스함을 주고받는 관계다. 시부모님의 돌멩이에 마음을 다치고 남편의 무심함으로 갈등이 있을 때 아빠와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울었다.
외할머니는 자식의 효도를 권리로 생각하시지 않는다. 자식들과 손주들이 해드리는 것에 항상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신다. 요즘은 효도나 경로를 권리로 생각하지 않는 어른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지만, 외할머니의 연세를 생각하면 새삼 대단하다. 지금은 체력 때문에 그만두셨지만 4~5년 전까지는 모든 식구들이 모이는 외할머니 생신에 집에서 떡을 만들어 나눠주셨다. 지금도 미국에서 사부작사부작 집밥을 해먹는 나를 위해 부식까지 챙겨두신다. 외할머니의 깔끔함과 따뜻함을 꼭 닮은 엄마와 이모들, 외삼촌들도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김장은 서로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고 애정을 확인하는 이벤트다. 김장 수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식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발적으로 김장을 돕는다. 외삼촌들은 댁에서 김장을 따로 하시지만 어머니와 자매들을 위해 농사를 지으신다. 엄마와 이모들은 외삼촌들 댁으로 김장 김치를 한두 통씩 챙겨 보낸다. 외할머니는 미리 동치미를 담가 두신다. 딸, 아들, 사위, 며느리를 가리지 않고 일하고 싶은 사람만 일하고 김장 김치를 먹고 싶은 사람만 먹는다. 아무도 오라 가라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야 서로 부담이 없다. 이 합동 김장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다.
결혼을 하면서 미국에 살았으니, 한국에 있는 양가 행사에 간 것이 손에 꼽는다. 그 중 두 번의 김장철을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두 번 모두 나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도 모르게 혼자 김장을 해치우셨다. 원래도 혼자 하던 일이고 딸도 안 하니까 (직장 근무) 며느리를 부를 이유가 없다고 하셨다. 며느리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연고가 되어 각자의 삶과 성격 차이로 생긴 생채기를 아물게 한다.
김장 김치가 외가의 사랑이라면, 열무김치는 부모님의 사랑이다. 초여름이 되면 엄마는 열무와 얼갈이를 사러 가신다. 열 단이 기본이다. 한 가득 사 와서 열무를 씻고 다듬고 나면 반으로 줄고, 절이면 또 반으로 줄어든다. 고춧가루를 써도 되지만 열무김치는 역시 홍고추를 갈아 넣는 게 맛있다. 잘 익은 열무김치는 열무국수, 열무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더워서 가출한 입맛이 돌아온다. 야식으로 라면에 열무김치도 일품이다.
초겨울 김장처럼 초여름 열무김치도 정해진 연중행사로 생각하는 딸이 눈에 밟히는지 엄마는 내가 미국에 산 후에도 때가 되면 열무김치를 담가서 보내신다. 일요일 내내 아빠가 열무를 다 씻고 다듬고 엄마가 양념을 만들고 김치를 완성시킨다. 열무의 풋내가 나는 상태로 집에서 가장 시원한 곳에 보관했다가 월요일 아침에 우체국으로 가져간다. 동네 우체국 말고 거점 우체국이어야 택배가 빠르다. 김치가 무겁기 때문에 아빠가 차로 우체국 입구 앞에 엄마와 김치를 내려주신다. 그렇게 딸을 향한 사랑이 담긴 열무김치는 미국에 오는 동안 딱 알맞게 익어 미국 날짜로 목요일에 도착한다. 열무김치를 받는 날의 메뉴는 참기름 솔솔 뿌린 열무비빔밥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열무김치 한 통에 담긴 정성을 모르는 초딩 입맛 남편과 나눠먹기 아깝다.
철마다 김치를 만들던 기억과 습관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도 김치를 담근다. 지금은 육아 때문에 잠시 멈췄지만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시간을 내서 다시 김치를 만들 예정이다. 미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만 20살에도 배추김치, 양배추김치, 깍두기를 만들었다. 결혼하고 미국 생활이 정착되면서 배추부터 사와서 김치를 담갔다. 그래서 엄마는 김장철에 무채를 넣지 않은 김치 양념을 따로 챙겨 손바닥만한 크기로 소분, 냉동해서 나에게 보내주신다. 1년 중 가장 맛있는 김치 양념을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배추만 절여서 김치를 담글 수 있다. 이 김치 양념은 두부조림이나 두부찌개의 양념으로 써도 맛있다. 작은 외숙모의 지혜다.
미국에 산 후로 매년 가던 김장을 못 가니 김장 때만 되면 엄마와 이모들의 고된 노동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 친정에서 지낼 때 초겨울 김장이 다가왔다. 엄마아빠만 다녀온다는 걸 이모들한테 아이들도 보여드릴 겸 닦달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외할머니가 심어 두신 국화가 화단 가득 피었고 아이들은 그 꽃잎을 하나씩 따며 까르르 웃었다. 모든 풍경이 그대로였는데 그 풍경에 아이들이 들어왔고 모두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진해졌다. 아이들의 기억에도 이 풍경이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외할머니께 몇 번이나 더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