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밤> 청운효자동 편을 보고
(커버 사진 출처: 카카오맵 티스토리 게시물)
나는 유희열 님의 오랜 팬이다. (관련 글: 가늘고 긴 팬질의 추억) 희열님이 새로 시작한 <밤을 걷는 밤> 청운효자동 편을 보다가 아주 오래전부터 글로 쓰고 싶었던 소재가 생각났다. 비루한 연애사에서 유일하게 기록을 남기고 싶은 순간.
결혼하고 아이들도 있는데 이런 기록을 남겨도 되는지 고민스러워서 미뤄두고 있었고 쓰더라도 서랍에만 넣어둘 예정이었지만, 죄를 지은 건 아니니 용기를 내어본다. (남편과 만나기 한참 전의 일이다.) 덧. 글을 쓴 지 두 달 가까이 발행할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밤을 걷는 밤> 세검정, 홍제천 편에서 익숙한 골목길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20대 초반 세검정에 살았다. (<밤을 걷는 밤> 세검정, 홍제천 편에서 희열님이 세검정을 본 후 큰 길을 따라 내려가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삼거리(5:35~)를 지나 집에 가곤 했다.) 나는 집에서 도보 20분 거리의 청운공원을 참 좋아했다. 낮에도 밤에도 서울 시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머리가 복잡하면 휘적휘적 청운공원에 걸어가서 인적 뜸한 벤치에 누워있다가 오곤 했다. 친구에게 맥주 마시러 나오라고 하여 정자에서 치킨을 배달시켜 먹은 적도 있다 ("여기 청운공원 정자인데요, 반반무마니 배달되나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개팅을 했는데 거절당했다잘 안 됐다. 며칠 낙담했지만 상대방도 소개팅도 잊고 지냈다. 얼마 후 친구 A와 나는 각자의 과 동기 B와 대학 친구 C를 연결해 주었다. 내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 후 그 둘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 결혼식에서 생애 첫 소개팅남 D를 다시 만났다. A가 역시 과 동기였던 D를 나에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 꽤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는 대로 써본다.
B와 C의 결혼식 며칠 후 D로부터 싸이월드(#옛날사람) 쪽지가 왔다. 안부를 묻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다음날부터 매일 문자를 주고 받았다. (아침 점심 저녁 자기 전 이렇게까지는 아니고 낮에만 잠깐 정도.) 또 며칠 후 D는 2주 정도 외국으로 출장을 갔다. 당시 회사에서 네이트온(#옛날사람)을 사용할 수 있어서, 친구들과 각자의 회사에서 네이트온 채팅을 하곤 했다. D의 출장지 아침 시간과 나의 야근 시간이 맞아 매일 채팅을 했다.
이쯤 되면 D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지만...
1) 소개팅에서는 내가 차였다. 본인이 거절한 소개팅 상대에 대한 마음이 바뀔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가 없어서 심심한가보다 짐작했다.
2) 한동안 연애를 할 뻔했지만 김칫국만 마시다 끝난 경험 때문에 아무 기대를 말자고 외면하기도 했다.
3) 나는 원래 연애 촉이 젬병인 데다 오랜 휴식기로 연애 세포가 전멸하여 이것이 호감의 표현인지 몰랐다.
4) 나는 D에게 "꺼진 소개팅도 다시 보자" 가 아니라, A를 통한 소셜 네트워크 차원에서 접근했다. 나는 당시 연애를 위한 노력은 하고 있었지만 남자친구가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게 지냈다. 당시 격주에 한 번 이상 만나던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싱글이었다. 퇴근 후와 주말에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신났다. 친구들의 접점은 달랐지만 (동네, 고등학교, 대학교) 성향/취향/코드가 비슷해서 친구들을 다 모아서 만나 놀기도 했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퍼진 점을 꿰고 있었고, 이것을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A를 중심으로 D도 나와 친구가 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많은 D의 과에서 나나 친구들이나 소개팅 한두 건은 노려볼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당시 내가 덕질하던 미국의 작가 아론 소킨Aaron Sorkin의 영화 제목에서 인용한 말이다.)
D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인지 그 다음날인지 야근을 하다가 갑자기 만나게 됐다. 늦게 만나서 문 연 식당 아무 데나 들어가 음식을 흡입했다. 그 주 토요일은 내 생일이었다. 전날인 금요일 저녁을 먹기로 미리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썸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지만 신경은 쓰였다. 어쨌든 과거에 연애를 목적으로 만났던 상대 아닌가! 집에 가는 길 친구 E에게 D에 대한 보고를 했다. E는 나에게 김칫국 마시지 말고 쓸데없는 행동(=끼부림)하다가 소개팅 인맥 날리지 말고 D와 친하게 지내라고 했다.
여기서 나는 왜 과거의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D와 쿵짝이 맞아 썸 아닌 썸을 타고 있었는가 한다면...
1) D는 키가 컸다. 보통 큰 것도 아니고 훌쩍 컸다.
2) 과거의 짧은 만남에서 나와 취향이 맞는 지점도 확인했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에 둘 다 관심이 있어서 같이 봤었다.
3)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D의 출장 기간동안 네이트온으로 꽤 많은 대화를 했었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눈치가 99단쯤 되었다.
문과에서도 심각한 여초의 문과대학에 갔던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로 이 정도의 남자를 찾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로 썸이든 아니든 이 시점에서 D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 D가 가보고 싶다는 삼청동의 한 식당에 갔다. 뭘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식당에서 나와 걷던 삼청동길에서 D가 내 뒤통수를 쓰담쓰담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D가 나에게 관심이 있나? 하는 의심을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서 D에게 잘 들어왔노라 연락을 했다. 컨택트렌즈를 빼고 화장을 지우고 씻고 맥주 한 캔을 따서 TV 앞에 앉았다. 금요일 밤,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할 시간이다. D와 계속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 자정이 넘어 내 생일이 되었다. 내가 맥주를 마신다고 하니 D도 맥주가 생각난다고 했다. 청운공원이 맥주 마시기 좋다는 나의 문자에 돌아온 D의 답장.
- 지금 갈래?
내 생일은 겨울이다. 겨울이라 청운공원에서 맥주를 "마시기 좋다" 고 말한 건데 (안 추우면 아까 저녁 때 갔겠지요.). 이 추위에, 이 야밤에, 공원 노천에서, 맥주를 마셔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30분 후에 부암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옷을 챙겨 입고 맥주를 꺼냈다. 풀밭에 앉아있으려면 엉덩이가 시리니 등산 방석도 챙겼다. 렌즈를 다시 낄까 고민했지만, 왜? 뭐라도 하려고? 안경 써서 안 될 사이는 안경 안 써도 안 돼, 그대로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았다.
D가 나타났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청운중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굴다리 아래를 지나 오른쪽 외길로 올라갔다. (<밤을 걷는 밤> 청운효자동 편, 희열님이 신호등 버튼을 누르고 횡단보도를 건넌 후 올라가는 길 (7:01~). 희열님 횡단보도 건널 때 약수터 박수 하시네요. ㅋㅋㅋ)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있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기대하지 말고 상처 받지도 말자고 주문을 외웠다. 심장이 귀에서 뛰고 있었다. D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몇 년 만에 다시 연락을 하면서 조심스러웠다고. 껄끄러울 수도 있는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줘서 고마웠다고. 그리고 물었다.
- 너는 나랑 지금 연락하는 걸 뭐라고 생각해?
- (심장이 얌전해짐) 소셜 네트워크?!
- (황당) 뭐??????????????????
- (진지) 내 대학 친구 중에 E라는 애가 있고 동네 친구 중에 F라는 애가 있거든. 걔네 내가 다 A랑 소개해줘서 같이 놀아. 모르던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친구가 됐잖아. 너랑 나도 A 중심으로 친구가 되는 그런 거?
가증스럽다. 몇 시간 전에 뒤통수 쓰담쓰담한 남자랑 생일에 한밤중에 야경 명소에서 맥주 들고 만나면서 그게 할 말이냐! 나의 궤변에 D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온정신으로 있기에는 너무 추운 겨울밤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만났다. 여하튼 D는 나를 다시 만나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는 말을 돌리고 돌려서 역시 궤변처럼 했다.
퍼스널 버블personal bubble사회적 거리을 두고 올라갔던 시인의 언덕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내려왔다. 소셜 네트워크 같은 소리 하네. <밤을 걷는 밤> 청운효자동 편에서 데이트 중인 연인 천지라 희열님이 물러섰던 그 시인의 언덕 말이다.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