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초보작가, 염가인생

어른이라는 명세서와 서슬 퍼런 계절이 지나간 자리

by 염가인생

깔끔하고 품위 있는 몸과 마음으로 사십 대를 맞이하겠다는, 출처 모를 개똥철학 기반의 목표의식 덕분에 작년부터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167cm의 작은 신장에 어울리지 않던 78kg의 체중을 63kg까지 감량했고, 어머니로부터 굳이 물려받지 않았어도 좋았을 욱하는 기질을 다스리기 위해 스토아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독서와 명상, 점심 식사 후 회사 뒤에 있는 나지막한 경사의 공원을 산책하는 루틴 덕에 지금까지는 나름 순조롭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찜찜하게 남아있던 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염가인생'이란 필명으로 내 삶을 담담하면서도 배꼽 빠지게 재미있게 풀어내겠다던 2020년의 포부는 온데간데없었다. 등단과 동시에 절필을 해버린, 슈뢰딩거의 고양이마냥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버린 초보작가로 지난 5년을 꽉 채웠다.


이십 대 유학생 시절에는 꽤 인기 있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기도 했었다. 그래서 마흔 전의 삶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뚝딱 써낼 줄 알았다. 방학 내내 뒹굴거리다 개학 하루 전,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를 견디며 몰아 쓰던 그림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건 그저 '처맞기 전까지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럴싸한 계획'에 불과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이상하리만치 글 쓰는 게 쉽지 않았고, 건조하게 메마른 마음은 단 한 구절에도 만족하지 못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밤시간 창밖의 불빛만 봐도 심상이 떠올라 거침없이 글을 쓰던 이십 대의 나는 이제 없었다. 당시 내 문학적 소양이 높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내 감정에 흠뻑 취해 미니홈피 일기장에 어울릴 법한 '이불킥' 감성을 쏟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을 뿐이다.


모니터의 하얀 페이지와 깜빡이는 커서를 멀뚱히 쳐다보며 보낸 지난 5년은, 전성기가 없었으니 슬럼프라 부를 수도 없는 기이한 교착상태였다. 돌이켜보면 그사이 있었던 사건들이 내 마음을 크게 할퀴고 지나간 탓일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가 뒤바꾼 일상, 그리고 장모님과의 이별이라 거대한 파도를 겪으며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길 때 필요한 최소한의 감성조차 꺼내기 힘들어졌다. 어쩌면 예전처럼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반될, 감성에 취해 보내게 될 하루를 원치 않는다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부터 절절한 멜로 영화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피하게 된 것도, 내 마음을 말랑하거나 저리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건조하게 방치해왔던 것도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모두가 그랬겠지만, 당시 코로나19 사태는 생각보다 훨씬 무도하고 집요하게 내 일상의 궤도를 비틀어 놓았다. 2020년 1월, 여느 때처럼 상하이에서 서울로 향하던 그 평범한 출장길이 내 중국 대기업 경력의 마지막 페이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0년의 삶이 고스란히 남은 상하이로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 돌아갈 수는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나날이 이어졌다. 투자사 관리 외에는 별다른 연고가 없던 청담동 호텔에 몇 달간 홀로 머물며 수백만 원의 투숙비를 감당해야 했고, 늘 곁에 있던 아내(그 당시엔 여자친구)와는 졸지에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고충을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할 만큼, 세상은 확진과 격리, 사망이라는 서슬 퍼런 단어들로 가득했다. 한중 양국의 매체가 연일 비정한 소식들을 쏟아내던, 기이하고도 서늘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곧 그동안 외국 살이를 핑계로 애써 유예하고 방치해 두었던 '어른의 삶'이라는 명세서가 시시각각 들이닥쳤다. 이직, 결혼, 신혼집 마련, 재테크, 그리고 부쩍 늙어버린 부모님의 노후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머릿속으로 밀려와 명료한 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당시의 내가 그런 주제들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안 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준비할 준비'조차 안 된 철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포브스 500대 기업이라는 화려한 수식이 무색할 정도로, 내가 근무하던 중국 회사의 급여는 한국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투자 애널리스트로서 받던 급여는 월세와 식비를 제하면 최소한의 저축만 허락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온갖 무리하고 기괴한 짓들—상사나 동료를 집으로 불러 대접하기 위해 수십만 원어치 식재료를 산다거나, 룸메이트들과 탁구를 치겠다며 거실 한복판에 탁구대를 들여놓는 따위의 일들—로 대부분 휘발되었다. '젊을 땐 역시 사람과 비전에 투자해야지'라는 그럴싸한 구호로 정당화했던 라이프스타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나의 그런 방종은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기약없던 미래에도 썩 좋은 투자가 되지 못했다. 상하이를 떠나올 때 내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이천만 원 남짓이 전부였다.


입국 금지, 격리 같은 살벌한 이야기가 도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더 살벌했다. 수중에 있는 돈이 마르기 전에 상하이로 돌아가든 한국에서 이직하든 돌파구를 찾아야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상하이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몸담았던 사업부가 그룹 내 경쟁에서 밀려 해체된 것이다.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던 그룹의 부회장님과 직속 상사,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빈자리를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이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순식간에 고립무원의 처지가 내몰리게 되었다.


세상 모두가 그러하듯,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불행은 은행 창구처럼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앞사람의 업무가 끝나야 다음 차례가 오는 식의 질서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그 상황이 결코 최악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오빠, 엄마 암이 재발했대. 검사받으러 가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병원도 제대로 못 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씩씩했던 아내의 훌쩍이는 목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 순간 내 마음은 아내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참담함과 걱정이 밀려온 것은 사실이나, '만약 내 어머니의 일이었다 해도 내가 같은 크기의 통증을 느꼈을까' 묻는다면 대답은 분명 '아니오'였다. 오히려 그 찰나에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나 공감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당혹감에 더 가까웠다.


아내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내 삶에는 근거 없는 오만한 확신이 있었다. 명문대 석사를 마친 뒤 글로벌 투자 그룹에서 활약하는 유능한 남자, 동시에 온 가족을 다정하게 보살피는 완벽한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사위. 그것이 당연한 나의 미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확신에는 단 하나의 뿌리도 없었다. 내 정신과 일상은 물러터지기 짝이 없었으나, 내가 그런 달콤한 환상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역설적이게도 내 주변이 너무나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모진 투병 중에도 생의 의지를 꺾지 않으셨던 장모님, 그 곁을 슬픔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담담히 지켜낸 아내와 가족들, 그리고 경제적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자존을 지켜온 나의 부모님까지. 결국 여태껏 내가 딛고 서 있던 땅은 나의 역량이 아니라, 그들의 강인함으로 다져진 단단한 지반이었다. 수화기 너머 훌쩍이는 아내에게 제대로 된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는 무기력한 내 모습을 통해 비로소 뼈아픈 진실을 깨달았다. 내가 맘 놓고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이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혹스러운 진실과 함께 부채감이 밀려왔다. 나에게 장모님의 병세는 아내의 고통을 통해 여과되어 전달되는 슬픈 소식이었지,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아니었다. 간절히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나눠 갖길 원했지만 매번 그 서늘한 온도 차이를 인지하는 순간 찾아오는 죄책감, 그리고 그 죄책감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내 앞가림이 버거웠던 현실이 뒤섞여 마음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뒤로 '정신을 차렸다.'라는 표현은 너무 진부한 것 같고, 그저 어떻게든 잘 살아보기 위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하고 싶은것과 하기 싫은것을 나누는 삶이 아닌, 해야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무너져 내리던 삶의 지반 위로 몇 가지 행운이 겹치며 상황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상하이에서 근무할 당시, 온갖 우여곡절 끝에 투자를 성사시켰던 한국의 한 기업으로부터 임원 제의를 받은 것이다. 회장님께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꼬장꼬장함과 매사에 필사적으로 임하는 태도, 그리고 어설픈 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이 마음에 들어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노라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말씀하시곤 한다. 실제로 당시 회사에서 삼십 대 임원은 나 하나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배짱이었나 싶지만, 당시 나는 연봉 1억 원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돌아갈 곳은 사라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내가 던진 배수의 진이었다. 감사하게도 회장님과 회사는 그 정신 나간 조건을 전격적으로 수용해 주었고, 그렇게 나는 회사 창립 이래 가장 파격적인 인사의 주인공이 되어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비로소 '생활'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지난 10년간 한 건의 제대로 된 금융 거래 기록조차 없던 내 이름 석자로 월급 통장을 만들고, 증권 계좌와 연금 계좌를 하나씩 개설했다. 남들은 이십 대에 이미 마쳤을 성인으로서의 걸음마를, 나는 서른 중반의 길목에 서서야 비로소 떼기 시작한 것이다. 상하이 시절, 벌이에 맞지 않는 큰 월셋방을 얻고 택시로 출퇴근하며 "돈은 패기 있게 써야 넉넉히 들어온다"던 헛소리는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서울의 살인적인 주거비를 감당하기 위해 회사 포장 창고로 쓰던 이태원의 먼지투성이 원룸에 간이 침대를 놓고 지내다 피부병에 걸리기도 했고, 회장님 지인의 배려로 잠시 비어있던 논현동 원룸에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몇 달을 머물기도 했다.


아내는 처가에서 장모님의 투병을 지키고 있었기에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하며 결혼을 준비했다. 금요일 퇴근길이면 수서역에서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김광석길 골목을 누비거나 수성못을 걷는 소박한 데이트가 이어졌다. 누구보다 힘겨운 시기였을 텐데도 서울에서 홀로 고생한다며 나를 다독이고, 결혼을 앞두고 내세울 것 하나 없어 찌그러지고 뒤틀린 내 자존감을 보살피느라 눈치를 살폈을 아내를 생각하면, 나는 상환 불가능한 채무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싶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튼 그렇게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조금씩 내일을 준비했다. 좌충우돌 뚝딱거리는 우리 부부의 어설픈 모습에 장모님께서 깔깔 웃으시던 찰나의 순간들은 지금도 가슴 저리게 기뻤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하루하루 야위어가던 장모님은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우리의 결혼식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아내는 특유의 씩씩함으로 하객들을 웃게 했지만, 사회를 보던 사촌 형만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그토록 감동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결혼식은 성료했으나 우리 부부에겐 신혼여행도, 깨가 쏟아지는 신혼살림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특별한 상의나 합의, 이해나 인내 같은 번거로운 절차과 감정 없이 자연스럽게 보류되었다. 2021년 11월, 적당히 온화하고 또 적당히 서늘했던 참 좋았던 가을날에도 여전히 코로나19의 여파는 가시지 않고 있었고, 회사는 실적부진과 더불어 수십억의 사기까지 당하며 창사이래 처음으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내는 악화되는 장모님의 병세를 걱정하며 처가인 대구에 남았고, 나는 회사에 터진 몇 겹의 악재들을 수습하기 위해 허겁지겁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가끔 온 세상이 작정하고 내 삶을 잡도리하려 덤벼들 때가 있다. 마치 '이것도 견디나 보자'라며 더 아픈 주먹을 휘두르는 것 같은 착각. 결혼 후 이듬해 봄까지가 딱 그랬다. 주말부부의 삶은 이어졌고, 장모님은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내가 대구로 내려가 그 힘겨운 상황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서울의 일상 또한 녹록지 않았다. 투자자들의 신랄한 비판과 항의, 변호사들과의 끝없는 회의, 그리고 팔자에도 없는 경찰서 출입이 이어졌다. 사기 사건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매몰되어 욕지기가 치밀 때도 많았지만, 침몰하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떠나보낸 직원들을 생각하면 불평할 자격조차 없었다.


극단적인 수준의 손실 인식과 대규모 구조조정, 그리고 주주들을 찾아가 문자 그대로 읍소를 하며 경영 정상화에 필요한 시간을 버는 나의 특별할 것 없는 전략 덕분이었는지, 그냥 일이 풀릴 시기가 되어서 그런건진 명확치 않으나, 2021년 연말부터 바닥을 찍은 매출이 반등하기 시작했고, 회사에는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대로 호스피스 병동의 장모님은 점점 시들어갔다. 식사를 하는 것도, 몸을 일으키는 것도, 말씀 한마디를 내뱉는 것도 힘겨워하셨다. 별 도움 안 되는 사위가 매주 내려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퉁퉁 부어오른 발을 한두 시간씩 주물러 드리는 것, 그리고 방정맞고 눈치 없는 눈물을 참아내며 벌개진 눈으로 먼산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2022년 여름, 장모님이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셨다.


말기 암 판정 후 참으로 긴 시간 동안 당신은 지독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가족들 곁에서 하루, 또 하루의 시간을 기어코 길어 올리셨다. 지친 육신이 더 이상 끌어낼 한 가닥의 생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장모님은 묵묵히 견디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내야 하는지를.


해외에서 아무런 기반 없이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던 시절, 아내와 함께 귀국해 처음 인사드렸던 날을 기억한다. 남루한 행색에 키도 작고 볼품없는 딸의 남자친구에게 장모님은 많은 것을 묻지 않으셨다. 오랜 투병으로 심신이 깎여나갔을 때도, 연봉 숫자가 찍힌 근로계약서 달랑 한 장을 들고 찾아와 금지옥엽 맏딸을 데려가겠다던 황당한 놈이 눈앞에 앉아 있을 때도, 장모님은 여전히 많은 것을 묻지 않으셨다. 삼십 년 넘게 정성으로 키운 딸을 내어주시며 어찌 궁금한 것이, 걱정되는 것이 없으셨을까. 하지만 장모님은 질문 대신 요리를 좋아하는 사위의 손에 예쁜 식기와 주방용품, 제빵기 같은 행복한 선물을 한아름 들려 서울로 보내셨다. 이제 막 세상으로 나서는 서툰 사위의 작은 자존감 하나 다치지 않도록, 당신은 언제나 말보다 깊은 묵묵한 행동과 배려로 우리 부부의 울타리가 되어주셨다.


생명의 불꽃이 희미해져 가던 그해 여름, 장모님의 상태가 위독하다는 아내의 연락을 받고 어떻게 회사를 나와 역까지 왔는지, 기차는 어떻게 탔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나는 장대비가 내리는 차창 밖 풍경에 반쯤 정신을 놓은채 기차에 앉아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발 세상의 시간이 잠시만 멈추기를, 떠나시기 전 장모님의 야윈 두 손을 잡고 "감사하다"는 그 한마디만이라도 꼭 직접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왜였을까. 아주 잠시지만 창밖을 보다 졸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짧은 졸음에 몇 년 전 장모님과 마주 앉아 국밥 한 그릇을 비우던 평범한 풍경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갔다. '콩나물과 시래기가 듬뿍 들어간 양선지해장국이었는데 왜 그때가 지금...' 그때의 기억을 미처 다 갈무리 하기도 전에 장모님께서 우리곁을 떠나셨다는 아내의 연락이 왔다.


6월 29일. 억수같이 쏟아지던 장맛비가 잠시 그치고,

구름 뒤로 기우는 햇살이 잠깐 고개를 내밀던 오후 5시 37분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돈한 서른여덟의 지금에서야 비로소 여유를 갖고 내 안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한없이 괴팍하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여리고 나약한 그 마음과 마주해 본다.


내가 그토록 글쓰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명확했다. 한 번 물꼬를 트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올 그 깊고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나의 서툰 글재주 탓에 그 가치가 절하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나의 지난 여정과 현재의 일상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피할 수 없는 산이 하나 있었다. 긴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신 장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감사와 죄송함이 뒤섞인 그 복잡한 마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이었다. 그 산을 넘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으니, 나는 여전히 참 미련한 사람이다.


나는 이제 내 인생에 붙은 낡은 가격표를 떼어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날것의 진심을 하나씩 기록해 보려 한다. 비록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문장일지라도, 이 기록은 장모님과 더불어 내 삶을 지탱해준 모든 소중한 이들이 내게 남겨준 삶을 살아내는 법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이 될 것이다.


그날 전하지 못했던 인사를 끝으로, 이제야 나는 내 인생에 붙인 염가(廉價)라는 꼬리표를 비로소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세상이 나를 상위 몇 퍼센트라는 숫자로 분류하든, 혹은 재난의 틈바구니에서 헐값에 팔려 나가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나를 기꺼이 할인 판매해 왔던 지난날의 고군분투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염가'의 푯말 아래 얼마나 거대하고 소중한 이들의 마음으로 다져진 지반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른여덟, 나는 더 이상 감정에 잠식될까 봐 두려워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이 기록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정가(正價)로 되찾기 위한 첫 번째 영수증이다. 비록 시작은 '염가'였으나, 그 끝은 결코 저렴하지 않을 나의 이야기들. 이제는 시작할 수 있다.


장모님, 그때 미처 전하지 못한 감사는, 당신이 챙겨주신 그릇에 아내와 함께 따뜻한 밥을 담아 먹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서 조용히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부족한 사위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해주셨던 그 묵묵한 사랑과 정이 있었기에, 제가 풍요로운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삶의 강인함과 그 고결한 배려를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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