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오만했던 시절에 내려진 유배(流配)
스무 살. 대개는 청춘의 가장 눈부신 구간으로 기억될 시간이겠지만, 나에게는 비대해진 자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던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당시 동기나 선후배들의 기억 속 나는 '괴짜'나 '또라이',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쓰레기'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혹독한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사실은 세상을 향해 이런 냉소를 내뱉으며 도망치기 바빴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조져버린 거, 그깟게 다 뭐가 중요하겠어."
요즘 말로 하면 "이번 생은 망했어(이생망)"와 비슷한 정서였을 것이다. 입대 전까지 내 일상은 단순했다. 밤새 술을 진탕 퍼마시거나, PC방 담배 연기 속에서 게임에 매몰되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기숙사로 기어 들어와 퍼질러 자는 것. 정말 망하기 딱 좋은 인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첫 단추'는 대학 입시를 뜻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0등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었고, 마음만 먹으면 1등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믿던 오만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엄마들의 치맛바람에 싸여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건 찌질하고 멋없는 짓이라 치부하며, 나는 공부조차 오만하게 했다. 수능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학비와 기숙사비, 해외 유학비까지 전액 지원받는 지방의 한 사립대 수석 입학을 선택했다.
"비싼 등록금 내며 서울에서 대학 다녀봐야 대단한 미래가 보장되느냐, 부모님 손 안 벌리고 유학까지 다녀오면 그게 최고다"라며 호기롭게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정작 시작된 대학 생활을 나는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지잡대에 나 같은 우수생이 가당키나 하냐"며 학교와 동문들을 향한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시절 나의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위태롭던 생활은 오래지 않아 밑천을 드러냈다. 특이함으로 포장해 부풀렸으나 속은 텅 빈 공갈빵 같던 자존감은 주변 사람들에게 잠깐의 흥미, 그리고 그보다 훨씬 빠른 염증만을 남겼다. 그런 나를 좋아한다며 설익고 풋풋한 애정을 주던 연인마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울며 곁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스마트폰도 SNS도 없던 시절이라 적당히 연결되고 적당히 단절될 수 있었다는 것인데, 덕분에 모두에게 외면받게 된 나는 지금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잊혀질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여느 날처럼 숙취로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난 기숙사 창밖으로 이미 기울어버린 태양을 보며, 나는 이제 정말 멈출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고, 그 길로 입영 신청을 했다. 학업에도 사람에게도 미련을 남길 것이 없었기에 논산훈련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우스울 정도로 가볍고, 심지어 설레기까지 했다. 부모님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입대를 선언한 하나뿐인 아들의 뻔뻔함에 어안이 벙벙해하셨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며 빠르게 받아들이셨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놔도 간다."
흔히 남은 군 생활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전역의 날은 온다는 희망의 격언으로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군 생활은 꾸역꾸역 버텨야 하는 고역이 아니었다. 탄약창의 탄약관리병으로 배치된 나는 금세 규칙적인 식사와 잠자리, 작업의 루틴에 적응했다. 뒤룩뒤룩 비대해진 몸뚱이를 다시 사용하기 편리한 상태로 되돌렸고,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던 살덩이의 무게가 줄어드니 바닥에 질질 끌리던 정신도 바짝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침번을 설 때는 책을 읽거나 외국어를 공부했고, 고개 하나를 넘어가야 했던 경계 근무는 밤하늘의 별빛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사색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되었다. 물론 이등병, 일병 시절 선임이 원할 때마다 우스꽝스러운 아이돌 안무를 추거나 흥미진진한 음담패설을 늘어놓아야 하는 '사회생활'도 있었지만, 그 또한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병영부조리나 폭력이란 살벌한 수식이 붙었을 많은 일들이, 그땐 일상의 소소한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전역 후에는 곧장 복학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학점을 관리하고, 돌아온 탕아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신 학과 교수님들께 제법 싹싹하게 굴며 학업과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살았다. 물론 캠퍼스에는 나를 기억하는 몇몇 이들이 남아 있었지만, ‘과거사 바로잡기’ 같은 헛된 욕심은 내지 않았다. 그들과 마주 앉아 해묵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땐 내가 참 철이 없었지, 앞으론 잘 지내보자" 따위의 말을 겸연쩍은 표정으로 건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무의미한 관계 회복이 헛되이 보낸 지난 시간을 보상해 줄 리도 만무했고, 설령 보상해 준다 한들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나의 방종과 오만으로 인해 떠나간 것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시절의 나에게 조금의 각색과 미화도 허락지 않고, 떠올릴 때마다 항상 나를 부끄럽고 불편하게 하도록 두는 것. 그것이 설령 부끄러운 과오로 점철된 기억일지라도, 온전히 나의 것이었던 그 세월을 추억하는 가장 품위 있는 방법이라 믿었다.
그 시절 나는 무리 속에서 왁자지껄하게 어울릴 때 느낄 수 있었던 안도감이나, 타인의 인정으로 반짝이던 자존감 따위는 무리에서 튕겨 나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무리를 밀어내고, 무리에서 도태되는 과정을 겪으며 학습한 것이었다. 물론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우리 모두는 결코 완벽한 고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무리를 찾는 우리 자신의 나약한 모습까지도 부정해선 안 되며, 따뜻이 품어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시절의 나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고립된 나 자신으로부터 길어 올린 마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살아감에 있어 모름지기 추구해야 할 '유일한 강인함'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편협한 확신을 배낭에 쑤셔 넣은 채, 나는 2년 간의 유학(유배)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의 심장부, 장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1년 1월,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두 시간 남짓 날아 어느새 장춘 상공에 도착해 착륙을 준비했다.
‘긴 봄’이라는 이 도시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늦가을부터 내린 눈이 석탄 가루처럼 검은 흑토 위로 켜켜이 쌓여 절반의 봄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 동북의 환경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다. 그럼에도 이곳에 ‘긴 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자는 필시 지독한 역설을 즐기는 변태이거나 그만큼 간절히 봄을 염원하던 누군가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참으로 열심히 공부한 중국어였지만, HSK 시험지의 답을 찾던 언어와 괄괄하고 거친 동북 사람들이 시비 걸듯 내뱉는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중국은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이자 낙후된 시민의식이 공존하는 양면의 국가이지만, 당시의 장춘은 달랐다. 처음 마주한 그곳에는 양면성 따윈 없었다. 오직 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언제 죽거나 죽임을 당해 저 차디찬 설원 속 어딘가에 파묻힐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누군가에게 소리를 질러댔고, 시도 때도 없이 불어대는 삭풍에 잔뜩 찌푸려 작아진 새까만 눈동자들은 ‘어떻게 저 어리숙한 한국 놈을 벗겨 먹을까’ 고민하며 반짝이는 듯했다.
공안들의 살벌한 검문을 마치고 장춘 롱쟈 국제공항(龙嘉国际机场)의 두꺼운 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영하 30도의 냉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뜨거운 액체를 삼키면 그 열기가 식도를 따라 흐르는 경로를 파악할 수 있듯, 차디찬 공기 역시 숨을 들이켜는 순간 기도를 거쳐 폐에 도달하는 궤적을 생생히 아로새겼다.
그 찰나의 감각만으로 나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 재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쉘터를 찾아 나설 때 거추장스러운 짐들을 하나씩 내버리는지를 말이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기어코 성공해 보겠다는 일념과 야망으로 바리바리 챙겨 온 책과 옷가지, 각종 생필품을 둘러맨 채 혹한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설령 갈 곳을 안다 한들, 이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이 무거운 야망의 무게를 다 들고 갈 수 있기나 한 걸까. 머릿속은 온통 대답 없는 의문들로 가득 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공항 앞에서 짐더미와 씨름하고 있는 내 모습은 그날 공항 앞에 모인 장춘의 모든 불법택시(黑车) 기사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며,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할 더없이 섹시하고 매력적인 모습이었을 터다. 누가 봐도 한국인인걸 알 수 있는 멀끔한 차림새에, 감당 못할 짐이 잔뜩 있는 데다 택시 승강장도 제대로 찾지 못해 공항 출입구 앞에서 얼을 타고 있는, 삼박자가 다 갖춰진 그 모습은 오늘 하루치 벌이, 아니 어쩌면 이번 한 주의 목표치를 한방에 벌 수 있는 더없을 기회였을 것이다.
곧 가장 용기 있는 불법택시 기사가, 이국에서 온 아름다운 공주를 쟁취하듯, 내게 용기 내어 다가와 물었다.
"형씨! 어디로 갑니까! 타세요!"
이 바닥에서 온갖 호객과 불법에 잔뼈가 굵었을 택시기사는 행선지를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우람한 팔뚝으로 내 짐을 낚아채 트렁크에 실었다. 그것은 무언의 통첩이었다. ‘넌 이미 다른 택시를 탈 수도, 운임을 흥정할 수도, 내 무쇠같은 전완근을 극복할 수도 없다’는.
"오.. 저는 길림대학교 우의회관으로 갑니다. 우의회관이요."
나는 최대한 당당하고 쿨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나의 중국어가 네이티브의 느낌을 물씬 풍겨 저 사악한 택시기사도 함부로 수를 쓰지 못할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누가 봐도 쪼다 같은 표정과 어눌한 발음으로 "저는 장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실 중국 자체를 오늘 처음 와봤습니다. 당신이 무슨 소릴 해도 저는 사리분별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를 외치고 있었던 셈이다.
"우의회관..우의회관이라~ 우의회관은 엄청 멀어요! 못 가요!"
"네? 우의회관은 길림대학교 유학생 기숙사입니다."
그때부터 사실상 대화는 불가능했다. 꽥꽥대는 기사의 말을 따라가기 위해 온 신경을 귓구멍에 집중했지만, 당시 내 실력으로는 몇몇 단어를 조합해 엉망진창으로 맥락을 유추하는 게 전부였다. 더 환장할 노릇은 설령 의미를 알아들었다 해도, 반격할 실력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한 달 생활비 2,000위안의 15%에 달하는 300위안을 뜯긴 채, 목적지에서 한참 떨어진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 정상 운임의 두 배가 넘는 거액을 지불했음에도, 지금도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는 동토 위에 유기된 것이다. 그것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한, 장춘이 내게 준 강렬한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