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자살은 살인과 구분되지 않는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는 자살을 하는 이유로 삶을 살아갈 가치가 없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 삶의 부조리라고도 불리는 이 심리적 기제는 단순히 말해 그저 '사는게 뭣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조금 납득되지 않는 것은 삶이 뭣같다는 건 이미 일상이기에 누구도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려 하지 않거나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같은 도피처를 통해 이를 잊으려 한다는 것이다. 신체적인 죽음으로 실행되기 전에 인간은 이미 정신적으로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굳이 죽으려 할까? 이미 죽어 있는데.
삶의 뭣 같음이 최종적으로 멈추려면 삶이 끝나야 하는 것이다. 고통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그러한 시도는 단순히 고통을 모면하려는 것과는 다르다. 삶이라는 고통의 순환 자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고통의 과부하는 역겨움(구토)라고도 불린다. 장 아메리의 <자유 죽음>에서 에셰크라고 이름 붙여지는 상황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절망과 좌절, 비유되기를 수험생의 낙방일 것이다.<자유 죽음>에 의하면 세상은 이 에셰크를 끌어안고 살아갈 강인함을 요구한다. 삶은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존 본능의 압박을 건다. 그러나 살아남았다고 다 승자가 되는가? 정말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정받는가? 불행히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 다 안다.
살아도 패자가 되고 죽어도 패자가 된다. 이러한 모순에 빠지지 않기에 위해 그들은 삶도 죽음도 모두 초월하고 싶은 것이다.그런데 이를 테면 묻지마 칼부림 사건들이 이 살아도 패자가 되고 죽어도 패자가 되는 문제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수동적 자살 대신 능동적 자살을 함으로써 새로운 답을 내놓으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능동적 자살이란 살인이다.
저명한 일본의 범죄심리학자들에 따르면 무차별 살인의 주된 원인은 빈곤과 고립, 그리고 자기 존재 증명 욕구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에셰크의 재료를 본다. 여기서 범죄자들이 느끼는 것은 강한 자존심 같은 게 아니다.나를 드러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정도의 이유가 아니란 말이다. 다른 이들의 '행복의 상징'을 파괴하려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유는 에로스라는 종족 보존의 원리, 사회의 기준에 속하고 싶은 본능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이 본능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생존 욕구인 것으로 앞서 말한 에셰크와 대조적인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대조적인 욕망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에셰크도 강하게 반작용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이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살아도 패자가 되고 죽어도 패자가 된다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차라리 자연적 자살을 하는 사람은 죽음으로서 삶이라는 부조리 그 자체에서 벗어나려 했다면,다른 이의 목숨을 가져가는 사회적 자살은 삶이라는 부조리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그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타인의 죽음을 대가 삼아 정서적으로 생존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장 아메리가 표현하듯이 자연적인 자살, 자유 죽음은 자신의 목숨을 대가 삼아 존엄성을 얻으려 했다면 사회적인 자살, 무차별 살인은 타인의 목숨을 대가 삼아 육체적으로 살아남고 싶었던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었던 것이다. 둘 다 생(生)을 간절히 바랐지만 다른 종류의 것을 바란 것이다.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동정한단 말인가? 라고 내게 질문한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이들에게 물리적인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본다.물론 이들은 본능을 위해 인륜을 저버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죄인이다. 하지만 이 범죄의 근원인 삶의 부조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살인이 아닌 자살을 했을 수도 있는 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어느 것이 가라지고 어느 것이 좋은 씨인지 알 수 없다.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에셰크라는 상황에서 그들이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만 불쌍하다고 생각한 범죄자들." 이것이 전형적인 세상의 부조리다.그 사람이 자기만 불행한 줄 알았겠는가? 남들도 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불행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인간이 사는 조건이 그토록 평등하다는 말인가?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삶의 부조리라는 늪보다는 승패를 가리는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난 나름의 가치를 인생에서 찾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럭저럭 견딜만해서 그저 신에게 쌍욕 몇번 박고 다시 삶을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고도의 자살은 살인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한 이들에게 감히 비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누구도 평생 패배자가 될 일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