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서평

by 최시헌

소설은 37살, 주인공 와타나베가 보잉 747기 좌석에서 스튜어디스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가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자, 스튜어디스의 괜찮냐는 질문에 와타나베는 그저 조금 슬펐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19살 아름다운 10월 날씨의 초원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사실 나오코에 대한 기억은 날이 갈수록 잊혀져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서로를 좋아했지만, 나오코는 어떠한 두려움에 깊이 빠져 있었고,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회상의 마지막에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그녀를 반드시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나오코를 기억하고자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나오코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나오코는 미션 계통의 품위있는 여고를 다녔다. 그런 나오코의 남자친구였던 기즈키는 와타나베와 함께 셋이서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다만 나오코와는 별로 접

점이 없어 기즈키가 없을 때면 대화가 어색해지는 평범한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기즈키와 함께 당구를 치던 어느날,기즈키는 평소의 유쾌한 모습과는 다르게 왠지 모를 진지한 태도로 당구를 쳤고, 와타나베와 헤어진 이후 느닷없는 자살을 선택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고향인 고베에서 떠나 도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활에서 한 가지 원칙을 세우는데,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기즈키의 죽음 이전까지 와타나베는 죽음이란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죽음이란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라고 와타나베는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한다.


기즈키가 죽고 1년이 지나고 우연히 다시 만난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나오코가 다니던 무사시노 외곽의 여대 근처에 깨끗한 개천이 있어 같이 자주 산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자연스러워진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교 의식처럼” 계속해서 만났다. 그런 어느 날,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안고 스킨십을 한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그녀가 갈구하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팔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온기이다.”라며 나오코가 기즈키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69년, 4월 중순에는 나오코가 스무살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그날 맛있는 저녁을 먹은 후, 나오코는 유난히 와인에 취해 평소답지 않게 어린 시절 일이나, 학교 일, 가족 일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던 나오코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와타나베를 앞에 두고 미친듯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나오코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이내 흥분에 빠지자, 와타나베는 그녀와 성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와타나베는 성관계 이후에 죽은 기즈키를 문득 언급하게 되고 나오코는 그 일로 본가 고베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만큼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나오코가 잠시 떠난 와중에, 와타나베는 강의가 끝난 다음 어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던 와중, 머리를 짧게 자른 아르바이트 여학생과 우연히 대화를 하게 된다. 우연히 만난 그녀는 연극사 2 강의 시간에 만난 1학년 여학생 미도리였다. 그녀의 짧은 헤어스타일과 다채로운 감정표현에 새삼 감동을 느낀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바야시 서점의 미도리는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제는 아버지마저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늘 애정이 결핍되어 있던 미도리는 자신을 100%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미도리와 만나기 이전부터 나오코에개 편지를 써오던 와타나베는 문득 색채가 가득한 세상에 자신만 무채색 현실을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해 내 젊음의 일부가 완전하고도 영원히 망가져버린 것 뿐”이라며 허무함을 느끼던 중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서 답장을 받는다. 고베에서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던 나오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룸메이트 레이코와 함께 와타나베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만난 와타나베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오코는 기즈키와의 관계에 대해서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어릴적부터 같이 자라며 영혼을 공유하며 사귀던 나오코는 기즈키와 섹스를 하려고 했었으나 나오코는 전회조차 제대로 느끼질 못했다. 그러자 기즈키에 대한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깊은 좌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녀의 사랑과 인생 전체가 부정되었던 것이다.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지는 않았으나 기즈키도 아마 이것에 충격을 받아 자살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를 마친 나오코는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다시 마음을 추스린 나오코와 만난 와타나베는 잠시 서로를 위로한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조금 더 시간을 두기로 한다. 와타나베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부자집에 유능하고 인기 많은 선배와 함께 술집을 다니며 매춘부들과 섹스를 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다니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종종 미도리와 만나 호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달 정도 나오코에게 편지를 보내지 못했고 심지어는 나오코의 룸메이트 레이코에게 자신이 미도리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결국 와타나베의 편지를 기다리다 못한 나오코는 어느 날, 자살한다. 와타나베는 다시 한번 나오코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을 레이코와의 섹스로 푼 다음,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러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의 아이돌 문단의 대표 인물로 평가가 늘 갈리는 인물이다. 나는 ‘아이돌’ 문단이라는 별명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져 하루키의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접한 하루키의 소설이 마로 <노르웨이의 숲>이다. 이 작품의 중심 구조는 죽음을 맞이한 나오코와 기즈키, 그리고 그 외 현실의 살아 숨 쉬는 사람들 간의 대립이다.


기즈키가 죽은 후, 삶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와타나베는 죽음이란 삶에서 분리된 것이 아닌 그것의 일부임을 깨닫고 일종의 실존에 임하게 된다. 나오코와의 만남에서도 다른 누군가의 팔, 즉 기즈키의 존재를 계속해서 의식하는 모습은 나오코의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곳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나오코에게서도 나타난다. 와타나베가 처음으로 받은 나오코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테니스와 농구를 해. 농구 팀은 환자와 스태프로 구성되어 있어. 그렇지만 시합에 열중하다 보면 누가 환자고 누가 스태프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버려. 이건 정말 뭐라 말하기 힘들만큼 이상한 느낌이야. 이상한 말이지만 시합하면서 주변을 살피노라면 누구랄 것도 없이 똑같이 뒤틀린 듯이 보이는 거야.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과 멀리 하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P.154~155


이러한 의미에서 자신의 현실을 일종의 괄호로 보류하고 자신의 죽음에 저항하는 ‘실존’은 어찌보면 또 하나의 도피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을 현실의 모든 것과 단절시키고 그 끝에로, 도망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와타나베는 비록 나오코처럼 정신 병원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애써서 타인의 감정에 무뎌짐으로써 나오코의 정신적 고통에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며, 그저 조금 편해지면 어떨까, 라면서 자신에게 쉬운 변명을 한다.


한편 기즈키와 나오코는 정말로 영혼을 함께한 연인사이였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있었기에 결핍이나 성장의 여지가 없었고, 그렇게 성장통 없이 나오코가 그와 성관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오코는 이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늘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나오코는 영혼의 저편에서 추방되었고 와타나베는 실존 속에 길을 잃는다.


결국 죽어떠나버린 나오코와 기즈키는 실존의 영역에 속한 존재들이고, 현실에서, 대학에서, 레스토랑에서, 길거리에서 미도리와 같이 “살아숨쉬는” 사람들은 약동하는 생명의 영역에 속한 존재들이다. 실존의 영역에 속한 이들은 진정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이 현실에 매달리고자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반면 일상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도 나름대로의 정신적 고통과 결핍이 있지만 그것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거나 무시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고 정신적으로 열린 공간으로 나오면서 실존의 손아귀에 붙잡히지 않는다. 사실 어찌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실존이라고 부르던 것이야말로 반(反)실존이 아닐까.


조금 더 세속적인 말로 하면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외면하고, 소외시키고는 잠시 관심을 주다가도 무시해버리는 잔인한 짓을 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딴 여자들 잘만 만나고 다니는 쓰레기이다. 자신이 기즈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유유부단해진 탓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그럴 것이었으면 애초에 나오코와 거리를 두던가, 나오코를 사랑할 것이었으면 끝까지 그녀를 붙잡고 끌고 나와 일상 속으로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내가 이런 관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본다면 나는 그가 와타나베의 편인지, 아니면 실존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려고 이 소설을 쓴 것인지에 따라 그의 소설이 이류 성인 소설인지, 아니면 현대의 고전이든지 평가를 달리할 것이다. 다만 덧붙이자면 맨 처음에 나왔던 초원의 우물, 즉 나오코가 초원에서 두려워하던 숲 속 어딘가에 숨겨진 우물의 비유를 보면 실존이란 정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짙은 암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