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계를 위해 관청에서 일을 하다가 작년에 먼 친척이 6000루블을 유산으로 남겨주었을 때, 당장 사표를 내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사람이다. 그는 관청에서 청원자들에게 심술궃게 행동하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천성이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의 내면을 가지고 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나는 심술궃은 인간이 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숫제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심술궃은 인간도, 착한 인간도, 야비한 인간도,정직한 인간도,영웅도,벌레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내 방구석에서 연명하면서, 현명한 인간이라면 진정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오직 바보만이 뭐든 되는 법이다,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포독스러운 위안이나 하며 나 자신을 약올리고 있다.(p.12)’ 그가 이토록 무기력했던 이유는 그만큼 그가 예민했기 떄문이다.
‘나’는 자존심이 끔찍이도 강하다. 그러면서도 절망감 속에서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자신에게서 어떠한 변화도 기대하지 않은 데서 쾌감을 느낀다. 이런 자괴감 속에 그는 자신과 다르게 ‘정상적인’ 인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들, 정상적인 인간들은 l’homme de la nature et la verite(자연과 진리의 인간)으로서, 세상의 자명한 진리와 법칙들에 따르며 그렇기에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안티테제인 ‘나’와 같은 사람들은 강력하게 ‘의식’하는 인간이며 그러한 가치들과 타협하지 못한다., 이들은 정상적인 인간에 대해 스스로를 비하하고 낮춘다.이제 생쥐와 같이 되어버린 그는 모욕감에 젖어 마음 속에 악의를 쌓는다. 즉흥적인 ‘활동가’들에 대한 열등감에 의해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부정하는 안티소셜(anti-social)의 존재인 것이다.
‘나’가 즉흥적이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꽉 막혀있다고 말함은 그들이 어떠한 사태의 본질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직관적인 확신에 차 판단한다는 점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본질적인 원인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찾을 수가 없고 따라서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히려 자연적 본성, 혹은 이성에 따라 결정되는 듯한 세상의 논리를 부정한다. 마치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나 공리주의의 논리처럼 즉 선함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므로 실현된다는 명제에 대하여 ‘나’는 그것이 어리석다 말한다.
실로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인간 문명이 세워지는 과정은 인간이 자신이 쉽고 평안하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제치고 혁명과 모험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문명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문명이 대체 우리 내부의 무엇을 부드럽게 해준단 말인가? 문명은 오직 인간 내부의 감각들의 다면성을 개발해줄 뿐, 더이상 단연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다면성이 발전함으로써 결국 인간은 아마 더욱더 피 속에서 쾌락을 찾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선이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것들은 그 과정도 결과도 모순적일 뿐이다. “이성은 오직 이성일뿐이어서 오직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만을 만족시킬 뿐이지만, 욕망은 삶 전체 즉 이성과 온갖 긁적임을 욕망하는 인간의 삶 전체의 발현이다.(…) 정말로 인간의 일이란 오직 자신이 오르간 스톱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있으니까.p.47”
‘나’에 의하면 길이란 어디로 나있든 거의 언제나 나있는 법이다. 파괴적인 혼돈에 인류가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파괴와 혼돈 또한 무척이나 좋아한다. 인간은 어떠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종착지에 가면 오히려 허망하게 된다. 마치 삶이 죽음에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그러나 의식은 그 이후에도 무엇이든 느낀다. 마치 생쥐가 그러하듯이 천국을 권태롭다며 비꼬면서.
24살, 우울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던 젊은 시절의 ‘나’는 그때도 역시 관청에서 겉돌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때의 ‘나’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까다로웠고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그들이 두려워 사회의 인습을 충실히 따랐다. 겁쟁이요, 노예였다.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면서. 집에 있을 때면 ‘나’는 책을 가장 많이 읽었다. ‘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적 감각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밤마다 고립 속에서 남몰래 두려움에 떨며 ‘나’는 이미 그의 영혼에 지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1부에서와는 달리 젊을 적 ‘나’는 영웅 아니면 진흙탕, 그 사이는 없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파멸시켰는데, 그 이유는 몽상 속에서만 영웅이 되고 현실에서는 온통 진흙탕 속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수기의 마지막에 ‘나’는 이 수기가 문학이 아니라 교도 감화를 위한 징벌이라 말한다. 여기서는 일부로 반주인공에게나 걸맞은 특성들을 일부러 담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삶에서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할 것 없이 절뚝거리고 있기에 이런 반주인공의 파편이 우리 가운데에도 박혀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업무로, 노동으로 여긴다. 그것에 매여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말대로 물론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성은 그저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ideal)은, 우리가 보편적 가치라 부르는 것들은 당신 내면의 아픔, 스스로에게마저 소외된 마음을 함께 느끼고 같이 다시 일어서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발걸음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란 사실 만들어진 것인지 발견된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도 솔직하다. 때로 그것은 우리를 기만하기도 하지만 그와중에도 그곳에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어쨌든 서로를 의지하기만 한다면 절뚝거리는 가운데에서도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어디가 앞이고 옆이고 뒤인지 알 수도 없지만 결말이 어떻든 우리는 길을 내어 왔으니까. 그러니 찌질해도 좋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우리가 잡아줄 당신의 손을 내밀어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