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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평집

다윈의 멋진 신세계

(Evolved Brave World)

by 최시헌

현대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헉슬리는 진화론에 대한 윤리 담론을 제시한 생물학자로 당대에 숱한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훗날 로마니스 강연이라 불릴 강의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19세기를 빛내는 명문으로 불리는 <진화와 윤리>라는 하나의 긴 서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론적 윤리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디스토피아와 진화론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멋진 신세계>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진화론과 올더스 헉슬리의 강연 내용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윈지능>이라는 최재천 교수의 진화론 에세이에 의하면 진화란 유전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개체들의 번식을 도와 자신들의 복사체를 보다 많이 퍼뜨리려는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를 자연선택이라고도 하는데, 자연선택의 ‘자연’은 ‘인공’의 반대 개념이라기보다 ‘인위’의 반대 개념이라고 한다. 구성원들 간의 자연스러운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이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 선택으로서의 진화에 대한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진화를 ‘진보’라고 여기는 관점인데, 최재천 교수는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서양인의 자연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Scala Nature, 즉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라는 뜻의 evolvere라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evolution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서양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부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면, 진보에는 목적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진화에는 목적성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진화가 ‘향상’이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거의 모슨 사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적응 현상들은 다 나름대로 향상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물의 처해있는 상황에서만 이를 평가해야 하므로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에 맞춰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진화’ 개념을 인간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것이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다. 사회진화론은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으로, 적자생존(Survival of fittest)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낸 이론이기도 하다. 최적자의 생존, 최 무엇이든 정점에 이른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논리는 과열경쟁을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이다.


그런데 최재천 교수가 생각하는 진화에서의 경쟁은 이와 다르다고 한다. 가장 잘 적응한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 모두가 제거되는 것이 아닌 가장 적응하지 못한 자 혹은 가장 운 나쁜 자가 도태되고 충분히 훌륭한 대부분은 살아남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그러한 면에서 진화는 상대적인 survival of fitter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자연에는 목적성이 없을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쩌면 진화는 사회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회학에 진화론이 많은 영향을 준 것을 부정할 수도 없거니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목적성을 뺀다면 사회의 다원성은 존재할지 몰라도 사회의 목적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사회에 있어 나름의 방향이나 의미가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성의 지나친 상대성을 옹호하는 것이 되고 이는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목적성의 진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토마스 헉슬리는 이런 진화론적 윤리의 문제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먼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의 내용을 살펴보자. 헉슬리의 강연은 강낭콩 줄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탐험을 감행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콩줄기를 따라 소년이 올라가 본 하늘 위의 세상은 지상과 똑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일면 지상과 같은 세계였다. 하지만 강낭콩이 만들어낸 하늘 위 세계의 풍경은 이상스럽도록 새로웠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음 콩 역시 아무리 섬세하고 복잡한 기관과 그 작용의 집합체인들 한들 콩은 콩일 뿐이었다.


이 섬세한 유기체가 하늘을 뒤덮으며 번성하기 위해서는 주변 식물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이 생명체는 분해되어 사라지고, 남겨진 씨앗이 다시 싹트면서 새로운 생명과정이 시작되는 것이 우주의 과정이다. 동물이나 인간 역시 식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을 거치게 되는 순환하는 진화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인간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라도 성공적인 투쟁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인간의 진보란 이와는 반대되는 과정을, 즉 자신이 타고 오른 사다리를 걷어차고 새로운 태도를 지니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동물적인 투쟁을 죄악시한다. 문명사회에서 사람들은 심지어 적자로 살아남기 위힌 투쟁을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듯싶은 자의 목을 베어 벌하기까지 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에 가장 유용해 보이는 행위를 벌하는 이러한 태도는 문명화된 인간의 징표다. 따라서 도덕적 감성과 같은 문명사회 인간 특유의 성질을 진화의 결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회 속의 인간은 우주의 진행과정을 따라 진화의 결과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진보란 모든 단계에서 우주의 과정을 막아내면서, 이 우주의 과정을 전혀 다른 방향성을 지니는 윤리적 과정으로 바꾸어 놓는 행위를 통해 성취된다.


이 윤리적 과정이란 사회가 맞닥뜨린 자연조건들 안에서 적자가 될 수 있었던 자들이 살아남는 과정이 아니다. 그 반대로 윤리적으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살아남게 만드는 과정이다. 사실 사회의 윤리적 진보는 우주의 과정을 흉태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과정으로부터 도망침으로써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주의 과정과 싸워 나가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토마스 헉슬리는 진화론적 무목적성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며 인간 문명은 이와 대적하면서 성장해 왔음을, 따라서 진보해 왔음을 주장한 것이다. 토마스 헉슬리는 특별히 자연선택론 자체에 반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생물학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문명의 진보를 인정하고 그 방향성에 대해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진화론자나 사회진화론자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윤리적 진보를 긍정한 진화론자, 토마스 헉슬리. 그렇다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인간 문명의 윤리적 진보에 대해서 어떻게 보았을까? 소설은 AF(포드 이후) 632년(그레고리력으로 서기 2540년)의 세계국 런던 도시에서 시작된다. 이곳의 시민들은 인공 자궁과 유년기 세뇌 프로그램을 통해 지능과 노동에 기초한 미리 결정된 계급(또는 카스트)으로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병에 있는 배아들은 계획된 역할에 맞게 화학 물질로 처리되는데, 상위 계급을 위한 배아들은 최적화를 위한 화학 물질을 받고, 하위 계급을 위한 배아들은 점점 더 불완전하게 만들어진다. 계급은 알파(계획된 지도자), 베타, 감마, 델타, 그리고 입실론(제한된 지능을 가진 단순 노동자)으로 구성된다. 각 카스트는 자신의 계급을 선호하도록 세뇌되며—입실론은 알파가 갖는 지적 부담이 없어 행복하다—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 가지 색상의 유니폼을 입는다.


부화장 직원인 레니나 크라운은 인기 있고 성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심리학자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의 고급 알파 카스트의 평균 구성원보다 키가 작아서 열등감을 갖고 있다. 수면 학습에 관한 그의 연구는 그가 사회가 시민들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방법(여기에는 진정 효과가 있고 행복을 생산하는 '소마'라는 약물의 지속적인 소비가 포함된다)을 이해하고 이에 반대하게 한다.


버나드는 레니나와 함께 세계국 밖에 있는 뉴멕시코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서 둘은 자연 출생한 사람들, 질병, 노화 과정, 다른 언어, 그리고 종교적 생활 방식을 처음으로 관찰한다. 마을 사람들의 문화는 아나사지의 후손인 호피족과 주니족을 포함한 푸에블로 민족과 같은 해당 지역의 현대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과 유사하다.


버나드와 레이나는 폭력적인 공공 의식을 목격한 후, 아들 존과 함께 보호구역에 살고 있는 린다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 역시 오래전에 휴가로 보호구역을 방문했으나, 그룹과 떨어져 남겨졌다. 그 사이에 그녀는 함께 휴가를 온 사람(버나드의 상사인 부화 및 조건화 책임자로 밝혀진다)에 의해 임신했다.


그녀는 임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세계국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존은 보호구역에서 평생을 보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적이 없으며, 그와 린다의 삶은 힘들고 불쾌했다. 린다는 존에게 읽기를 가르쳤지만, 그녀가 소유한 유일한 책인 과학 매뉴얼과 포페가 근처에서 발견한 또 다른 책인 셰익스피어 전집으로만 가르쳤다.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존은 자신의 감정을 《태풍》, 《리어왕》, 《오셀로》,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햄릿》에서 자주 인용하는 등 셰익스피어 극의 용어로만 표현할 수 있다.


린다는 이제 런던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존도 어머니가 자주 칭찬했던 이 "용감한 신세계"를 보고 싶어 한다. 버나드는 자신의 추방 계획을 좌절시킬 기회를 보고, 린다와 존을 데려갈 허가를 받는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존은 책임자를 만나 그를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이 저속한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굴욕 당한 책임자는 버나드를 추방하려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수치심에 사직한다.


버나드는 이제 유명인으로 대우받는 "야만인" 존의 "관리인"으로서, 사회의 최상층 인물들에게 아첨을 받으며 한때 경멸했던 관심을 즐긴다. 그러나 버나드의 인기는 일시적이며, 존이 문학적 성향을 가진 헬름홀츠와만 진정으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


추하고 친구가 없다고 여겨지는 린다는 오랫동안 갈망했던 소마를 사용하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는 반면, 존은 비어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 충격을 받아 버나드가 주최하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기를 거부한다. 레니나와 존은 서로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기초한 존의 구애와 로맨스에 대한 관점은 레이나의 자유분방한 성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맞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유혹하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공격한 뒤 갑자기 어머니가 죽음의 문턱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린다의 침대 곁으로 달려가 스캔들을 일으키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조건화"를 위해 병동에 들어온 몇몇 아이들이 존에게 무례하게 대하자, 그는 한 아이를 신체적으로 공격한다. 그런 다음 그는 하위 카스트 집단에 대한 소마 배포를 중단시키려 하며, 그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헬름홀츠와 버나드는 발생한 폭동을 멈추기 위해 달려오고, 경찰은 군중에게 소마 증기를 뿌려 소동을 진압한다.


버나드, 헬름홀츠, 그리고 존은 모두 "서유럽 거주 세계 통제관"인 무스타파 몬드 앞에 끌려가고, 몬드는 버나드와 헬름홀츠에게 반사회적 활동으로 인해 섬으로 추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버나드는 두 번째 기회를 간청하지만, 헬름홀츠는 진정한 개인이 될 기회를 환영하며, 나쁜 날씨가 자신의 글쓰기에 영감을 줄 것이라고 믿어 목적지로 포틀랜드 제도를 선택한다.


몬드는 헬름홀츠에게 추방이 실제로는 보상이라고 말한다. 그 섬들은 세계의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 즉 세계국의 사회 모델에 맞지 않는 개인들로 가득 차 있다. 몬드는 존에게 현재 사회로 이끈 사건들과 카스트 제도 및 사회 통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설명한다. 존은 몬드의 주장을 거부하고, 몬드는 존의 견해를 "불행할 권리"를 요구한다고 주장하며 요약한다. 존은 자신도 섬으로 갈 수 있는지 묻지만, 몬드는 거절하며 존에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새로운 삶에 지친 존은 포텐햄 마을 근처의 버려진 언덕 위 등대로 이사하여, 자기 채찍질을 실천하며 문명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고독한 금욕적 생활 방식을 채택하려 한다. 이는 기자들과 결국에는 그의 기이한 행동을 목격하길 바라는 수백 명의 놀란 구경꾼들을 끌어들인다.


한동안 대중의 관심이 다른 오락거리로 돌려진 후, 존이 혼자 남겨질 것 같았으나, 한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멀리서 존의 자기 채찍질을 몰래 촬영했고, 이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자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더 많은 기자들을 태운 헬리콥터가 도착한다. 군중들이 존의 은신처로 몰려와 그들을 위해 채찍질 의식을 행하라고 요구한다. 한 헬리콥터에서 레이나로 암시되는 젊은 여성이 나타난다. 존은 자신이 동시에 숭배하고 혐오하는 여성을 보자, 분노로 그녀를 향해 채찍질을 한 다음 자신에게도 채찍질을 가하는데, 이는 군중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야만적인 행동은 소마에 취한 난교로 변한다. 다음 날 아침, 존은 땅에 깨어나 난교에 참여한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차 있다.


그날 저녁, 지난밤의 난교 이야기가 모든 신문에 실린 후 헬리콥터 무리가 지평선에 나타난다. 가장 먼저 도착한 구경꾼들과 기자들은 존이 자살해 목을 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세계국이라는 가장 진보된 사회와 ‘야만인 보호 구역’은 서로 완전히 대비되는 구역이지만 둘 다 디스토피아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세계국의 문명은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진보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개성이나 사회적 윤리가 ‘인류의 안녕’이라는 목적 아래 철저히 통제된다는 면에서 분명 자연과 가장 적대적인 관계에 속해있지만 윤리성과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사회이다.


반대로 ‘야만인 보호 구역’은 매우 낙후된 물질적 환경에 처해 있으며 문명에 노출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지낸 곳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아메리칸 원주민들이 그러했듯이 인간의 야생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 한편으로 그들은 종교적인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가족 관념과 같이 인간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덕관념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환경을 겪은 후 자살한 존은 이들 사회가 모두가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쪽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승리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실패한 상황이고 한쪽은 본질적인 인간성은 지켰지만 문명의 수준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 엄청난 괴리를 존은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존은 이상사회가 된 세계국에서 도태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 헉슬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인류의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인간의 진보는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 사회가 아닌 , 윤리적인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국이라는 디스토피아는 진보가 아닌가? 어떠한 면에서 보면 이는 자연선택의 결과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문명을 통제에 최적화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진화의 변수를 최대한 줄여 ‘적응’에 성공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기술적 특이점이 인간 종을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 승격시키는 전례 없는 혁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록 인공지능은 자연선택의 영향을 받는 생물은 아니지만 인간의 기술적 진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회진화론적 결정체라면 호모 사피엔스가 도태되는 것은, 즉 본질적인 인간성이 도태되는 것은 합리적인가? 만약에 인공지능이 사회진화론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적 퇴장은 윤리적으로 퇴보하는 현상인가?


토마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연에 대적하면서 성장해 왔다. 이는 다시 말하면 자연의 폭력적인 무목적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보’ 해왔다는 의미이다. 포스트휴먼이라는 존재는 그러한 존재여야 한다. 아무리 우리가 인간 이상이 되었다고 해서 역사적으로 성찰되어 온 인간성의 윤리적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진화론의 윤리적 파장에 대해 민감했던 다윈이라면 오늘날의 멋진 신세계에 대해서 같은 주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헉슬리.jpg 토마스 헉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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