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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평집

멜랑콜리아 I-II(욘 포세) 리뷰

by 최시헌

소설은 뒤셀도르프의 1853년 늦가을 오후로부터 시작된다. 한스 구데의 독일 예술 아카데미에 다니는 라스 헤르테르비크는 아틀리에에 가기 싫어서 침대에 누워있다. 한스 구데가 자신이 화가가 될 재능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일렬로 서서 그림을 그리면 그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싫었던 탓이다.


라스는 자신이 그림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한편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림에 소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가 하숙하고 있는 곳은 빙켈만 씨의 집이고 라스가 자신의 연인이라고 말하는 헬레네가 살고 있었다. 지금 라스는 헬레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헬레네에 대해서 라스는 매우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서 이런 저런 상념이 오가는 와중에 헬레네가 와서 빙켈만 씨가 라스를 내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헬레네는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라스는 헬레네에게 성적인 행윆까지 하며 자신이 헬레네와 연인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헬레네는 매우 불쾌하다고 말하며 라스의 손길을 싫어했다.


그렇다! 실은 이 모든 것이 라스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전부 라스의 말처럼 그림을 못 그릴 리도 없고 헬레네가 라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라스가 두려워하듯이 자기 삼촌인 빙켈만 씨를 좋아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라스는 망상에 가득 차있다.


결국 쫓겨난 라스는 독일의 예술가 클럽인 말카스텐에 가기로 한다. 쫓겨난 후에 갈 곳이 없었기 대문이다. 라스는 동료들이 모여 사교를 나누는 그곳을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라스는 그곳에 입성하고 말았다.


말카스텐 문 안쪽에는 알프레드가 서 있었다. 라스는 알프레드와 함께 앉고 싶지 않았다. 라스는 혼자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그에게 같이 앉자고 소리쳤기에 라스는 할 수 없이 알프레드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라스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희고 검은 천이 그에게 다가오는 환상을 보고는 했다. 그는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말카스텐에 있었던 그의 친구들은 그를 가난뱅이라고 비웃고 변태라고 비웃었다. 온갖 비웃음 끝에 라스는 길거리로 도망쳐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또다시 쫓겨난 라스는 다시 말카스텐에 가게 되고 이번에는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마치 학생과 상담을 할 것 같던 구데 역시 라스를 비웃을 뿐이었다. 술에 취한 화가들에 둘러싸여 온갖 비난과 조롱을 받던 라스는 결국 경찰관에게 끌려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이제 소설은 가우스타 정신병원으로 배경이 바뀐다. 라스는 병원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의사는 그것이 건강해지기 위한 조치라고 하였다. 라스는 갈매기를 보는 환각에 다시 빠졌을 뿐이었다. 그는 욕구 불만에 빠져 날마다 자위를 하며 헬레네에 대한 분노와 화가들에 대한 분노에 가득 휩싸여 있었다. 의사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분투하지 않으면 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991년 늦가을 저녁, 노르웨이 오사네로 배경이 다시 바뀐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실존인물인 라스 헤르테르비크라는 풍경화 작가를 소재로 쓰인 삼십대 중반의 실패한 작가 비드메가 쓴 소설이었다. 비드메는 라스의 먼 친척이다. 어느 날 우연히 국립 미술관에서 라스의 그림을 보고 어떠한 신성한 느낌을 받은 작가는 그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노르웨이의 교회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실 비드메는 자신의 소설을 위해 라스 헤르테르비크의 고향에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별로 큰 소득은 없었지만. 다만 그곳의 쓸쓸함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로 도착한 뒤에 한 여성 사제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비드메는 지금까지 신과 신성함에 대해 입에 올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드메는 신에 대한 말을 입밖에 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참했던 라스의 삶을 고찰하다보니 문득 삶의 순간들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절망에 빠져 운명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서 떠올리게 된다.


멜랑콜리아 2부로 가면 어부 마을의 노인 올리네가 산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의 동생 라스가 와서 담뱃값을 할 일을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마땅히 줄 일도 없거니와 돈도 별로 없어서 담뱃값조차 되지 않는 돈을 쥐어 줄 수밖에 없었다. 라스는 언제나 미친 사람, 들쥐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불리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고 집 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 때때로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밖에 나가 동굴이나 널판지에 그림을 그리고는 하였지만, 또 언제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라스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미친 라스를 추억하는 올리네의 기억은 사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한다. 할머니가 된 올리네는 치매에 걸린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라스의 혼란스러운 모습과 겹쳐보인다. 안쓰러울 정도로 힘들어보이는 올리네의 모습은 그녀가 숨을 거둘 때에서야 비로소 평안한 빛을 맞이한다.


이 소설에서 정신 병원에 갇힌 라스에게 의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분투하지도 않으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한 부분은 라스에게 있어서 오히려 형벌과도 같았을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욕구하고 분투하지 않는다면 그는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 될 것이다. 그는 흐르지 못해 지하에 갇혀버릴 것이다. 그에게 새로운 욕구와 이어나갈 생의 투쟁을 허락하지 않으면 영원한 어둠 속에 죽어 있을 뿐이다. 망자에게 어떻게 빛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렇게 차가운 눈 속에 파묻혀간 잊혀진 영혼들이 수없이 많으리라. 라스의 그림은 사후 재조명 받았고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극찬했지만 기억조차도 되지 못하고 이야기조차 없어 먼지가 되어버린 영혼들은 누가 위로할까?


올리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때 평안해보였던 이유는 어쩌면 라스와 같이 인생이 절망스러워 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을 지켜봐주고 기다려주고 보살펴주었기에 먼저 죽은 라스로부터 되돌아온 한 줄기 빛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가난했던 라스와 올리네 집안에서 라스와 같이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과 끝까지 함께한 그 인내심과 가족으로서의 사랑은 사회에서 라스를 매장해버린 인물들과 상반된다.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라스와 같이 정말 신의 자비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참 많다. 찬란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열매를 다 맺지 못한 채 사라져가야 했던 사람들도 그중에는 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을 때, 우리의 도움이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어 주고 그들 나름의 고난과 역경을 같이 싸워준다면, 언젠가 우리 자신의 삶이 초라해졌을 때, 그들로부터 한 줄기 빛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야 말로 작가 비드메가 별안간 느꼈던 성스러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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