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발리바르의 '개념에 도착하게 되는 방식'을 중심으로
에티엔 발리바르는 <개념의 정념들>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개념을 통한 사유의 정념을 가졌던 철학자들의 사유를 논평하고 철학에서 개념에 도달하게 되는 방식에 관한 것에 대해서 논의하게 된다. 여기서 다루었던 주제는 총 세 가지로 진리의 역사,이단점, 그리고 사유의 존재로적 규정으로서의 상승과 인식론적 의미에서 항상 논쟁적인 상승들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주제인 '진리의 역사'에 대해서 그 1장과 3장을 참고하여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을 비평해보기로 하였다.
1장에서는 조르주 캉길렘 철학에서 과학과 진리에 대해서 다룬다. 이에 따르면 캉길렘은 갈릴레이의 사례를 가져오면서 기존에 구성되지 않았던 과학적 진리가 가지는 규칙들의 부재 속에서 갈릴레이는 사후적으로 인정받을 보편적인 진리 체제를 예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참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의 시간에 대한 불균형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는 그 시대의 상식보다 앞설 수 있지만 동시에 그 당대 사람들에게는 뒤쳐진 지식일 수도 있기에 비-참(non-vrai, non-truth)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치 원자론과 유전학, 진화론이 거쳐야 했던 역사적 수난이 그러했듯이 과학의 역사는 오직 과학의 역사이기만 할 수는 없고 시대마다의 과학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그래서 캉길렘은 특수한 과학적 체계들은 통상적인 분과 과학보다 확장적이며, 과학 이데올로기와 확립된, 그리고 확립될 과학 사이에는 무한한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3장에서는 이전 장과는 달리 "교회의 역사는 진리의 역사라 고유하게 불려야 한다."라는 파스칼의 유명한 구절에 관련한 진리와 신학의 관계를 다룬다. '진리의 역사'는 기독교 신학에서 사도적 전통에 의한 구원자의 가르침에 대한 계승, 즉 복음을 의미하며 이는 교회의 권위와 하나를 이룬다. 이러한 역사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섭리주의적 계시와 구원의 역사를 의미하는 '신의 도성' 서사와 다른 하나는 세속의 이단화이다.
이 서사 또한 두 가지로 대립되는데, 유대민족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 그리고 '민족들'과 국가들의 역사이다. 그런데 유대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구약의 의미만 가지고 있을 뿐 바오로에 의하면 이들은 언제든지 접붙여지고 떼어져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교화의 역사는 사회정치적으로 전체 네이션의 일반 역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사실상 예수의 부활 이후 인류의 역사나 다름 없는 것이다.
여기서 파스칼이 고민한 것은 교회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라면 교회의 역사는 타락한 역사인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의 갈등과도 관련이 있는 질문이었는데 자유의지가 없는 예정된 구원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교회의 역할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또 다른 아담에 불과할 뿐인가? 그리고 교회는 진정 그 시작부터 타락한 체제인가?
파스칼이 가진 고민은 이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앞의 고민과는 반대로, 교회가 세속과 대립하는 이른바 과학의 이단화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과학철학자이기도 했던 파스칼은 신앙과 이성을 화해시키고자 하였는데, 그에 따른 문제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작업이었다. 기독교적 원리는 어디까지 적용되는가? 신약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신학에 한정되는가, 아니면 세속의 과학과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이중적인 고민에 대해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교회와 신의 관계와 교회와 세속의 관계가 맞닿는 이중적인 경계인 교회는 그 신학적 범위를, 그 특수한 접합부위를 오직 그리스도교적 신앙에만 한정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만큼은 일반적인 이성의 틀이 아닌 고유한 진리로 남겨져야만 비로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타락되지 않은 신학이 되기 때문이다.
1장과 3장의 의미는 과학의 역사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리에 접근하기와 교회의 역사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진리에 접근하기 등의 개념에로 도달하는 방법이었다. 과학을 예언적인 동시에 비판적인, 한 마디로 유동적인 자리에 놓고 신학을 그 본질에 충실하게 하는 정적인 자리에 놓는 발리바르는 그 두 가지 진리를 대등한 선상에 놓으면서도 분명히 그 사이를 구별한다. 그렇지만 정녕 이렇게 미완된, 연결되지 못한 상태의 복수의 진리를 허용할 수 있는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은 이러한 질문을 풀기에 좋은 알레고리이다. <한 여름밤의 꿈>은 아테네 공작인 테세우스와 아마존 여왕이자 테세우스의 왕비인 히폴리타의 결혼식에서 벌어지는 헤르미아,리산더,헬레네,테메트리우스, 그리고 요정왕과 여왕의 사랑과 질투의 희곡이다.
1막에서는 테세우스와 히폴리타의 결혼식에 라산더와 헤르미아의 연애가 에게우스에게 반대당하자 테세우스 앞에서 헤르미아가 자기 아빠 에게우스에게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자리를 나와 리산더와 몰래 만난 헤르미아는 사이좋게 이런 상황을 불평한다. 이 때 헤르미아는 "진정한 연인들이 언제나 역경을 맞았다면 그건 운명의 칙령이겠군요."라고 말하며 서로의 사랑을 인내로 버텨내자고 리산더를 응원한다. 그러자 리산더와 헤르미아는 사랑의 도피를 충동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한편 결혼식 축제 막간극을 짧게 준비하는 하인들의 모습들도 나오는데, 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의 제목은 '피라모스와 티스메의 잔혹한 죽음' 이다. 피라모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티스에와 사랑의 도피를 약속하였으나 티스메가 사자에게 먹혀 죽은 줄로 착각한다. 이에 그는 자살을 하고 티스메는 그걸 보고 자살을 하는 것이 연극의 내용이다.
2막에서는 오베른과 티타니아라는 요정왕과 요정 여왕이 서로의 불륜 때문에 다투는 내용이 나온다. 유치한 다툼이 끝나고 오베른은 티타니아의 눈에 사랑의 약초인 삼색 제비꼿을 떨어뜨려 소소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데메뜨리우스를 짝사랑하는 헬레네는 그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그런 헬레네를 데메뜨리우스는 끊임없이 심한 말로 비난을 하지만 그녀는 "여자는 구애대상이지 구애의 주체로 태어나지는 않은 거잖아요."라고 말하며 데메뜨리우스가 그녀를 죽여도 기꺼이 그 손에 죽겠노라고 말할 정도로 애절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오베른은 숨어서 그 광경을 보다가 가엾은 헬레네를 돕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오베른이 하인에게 내린 명령과 달리 하인은 리산더의 눈에 남은 약초 즙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리산더의 첫 눈에 띄어 사랑에 빠지게 된 대상은 다름아닌 헬레네였다.
3막에서는 티타니아가 밑바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텀이라는 직조공과 사랑에 빠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시작으로 불행에 빠진 연인 아닌 연인들이 싸우는 난장판까지 보여준다. 이떄 티타니아를 실컷 속으로 놀리던 오베른은 티타니아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았고 서로 결투까지 하기로 한 리산더와 데메트리우스를 잠들게 한 다음 리산더의 눈에 마찬가지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약초 즙을 넣는다.
4막에서는 헤르미아의 아버지 에게우스와 테세우스 공작, 그리고 히폴리타 여왕에게 두 쌍의 연인이 쓰러진 채로 발견이 된다. 잠에서 꺠어난 리산더는 비몽사몽에 사랑하는 헤르미아와 도피할 계획을 털어놓게 되고 하마터면 사형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미리 요정왕이 데메트리우스의 눈에 원래 계획대로 헬레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약초를 넣어놓았기 때문에 데메트리우스가 헬레네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일등 신랑감이었던 데메뜨리우스가 헬레네를 마침내 연인으로 맞아들인다. 그리하여 리산더와 헤르미아 또한 무사히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5막에서는 이렇게 결혼에 성공하게 된 3쌍의 커플이 무언극 "피라모스와 티스메의 잔혹한 죽음"을 관람하게 된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그토록 비극적일 수가 없는 피라모스와 티스베의 선택이 이 무언극에서는 서투르고 지루한 연기 때문에 마치 바보짓으로 느껴질 정도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서투른 무언극과 같은 우스운 비극이 탄생한 것이다. 연극 그 자체로만 보면 비극이다 못해 냉소와 회의주의만 남은 끔찍한 작품이지만 연극밖의 결혼식에서는 이를 보고 있는 이들의 행복만이 준비되어 있다.
데메트리우스가 헬레네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과 바텀이라고 불리는 직조공에 잠깐 사랑에 빠졌던 티타니아가 오베른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는 과정은 주체와 객체의 동격화가 이루어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네는 분명히 구애를 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구애를 할 수가 없었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다. 또한 큐피드의 화살이 떨어진 곳에 피어난 삼색제비꽃이 사랑의 약초가 되었다는 설정은 천상의 사랑이 바로 그 운명의 장난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의 도식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러한 <한여름밤의 꿈> 변증법은 사랑은 비극의 고도를 좁혀 희극을 짓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밤에 등잔불을 키고 아침이 올 때까지 깨어있어야 비로소 예수와 영적으로 결혼하는 신부로 묘사되듯이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와 시공간적 거리를 좁혀 보편적 사랑을 현실에서 이루며 지속시키는 존재여야 한다.
물론 이런 순박한 신학은 발리바르의 치밀한 사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성과 교회의 거리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이데올로기적 일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인류의 비극이 언젠가는 서투른 무언극과도 같은 흑역사로 남고 우리의 새로운 희곡이 탄생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오 바다가 육지로 미친듯이 밀려온다. 사랑으로, 사랑으로.("끝없이 흔들리는 요람으로부터",월트 휘트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