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쓴 <개인주의,이타주의,그리고 인간의 조건>이라는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정리했듯이 필자는 개인주의의 한계와 이기적인 집단주의의 모순에 대해 비판하며 ‘새로운’ 이타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인간 도덕의 근본을 세운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이타주의는 종교이다.
물론 종교도 종교 나름이니만큼 여기에서는 샤먼 종교나 광신교, 이단이 아닌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적인 교리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들 종교의 주된 교리는 ‘자기 희생’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이타적인 사랑을 무차별적으로 베풀 것을 요구하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조차도 결심해야 한다 (이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교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종교는 꾸준히 다루어져 왔다. 오귀스트 꽁트의 인본주의 종교나, 뒤르켐의 종교사회학과 같은 고전적인 연구외에도 현재에는 인지 인류학을 통해 인지종교학이 생겨나 자연적인 심리적 기전이 그로 하여금 어떻게 인간이 종교적으로 행동하게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인지종교학은 진화심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이전까지는 종교는 진화의 부적응적 부산물일 뿐이라며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종교는 ‘개인’의 진화를 방해하지만 인간 마음이 설계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 로빈 던바의 <신을 찾는 뇌>는 같은 인지종교학에 입각하여 기존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책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 종교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능,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학적 신경 생물학적 메커니즘, 그리고 종교의 기원등인데, 내가 이 책에서 특히 주목했던 주제는 종교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능과 사회심리학적으로 종교가 작용하는 매커니즘이다.
먼저 종교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기능에 대해 저자는 개체 수준의 이익, 사회수준의 이익, 그리고 공동체 결속 매커니즘 등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통일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종교는 우리가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세계의 더 변덕스러운 행동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세계를 납득하게 해준다.
사회 수준의 이익에 대해서는 다윈주의 세계에서 이타적 행동의 악용위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논의를 계속한다. 이에 따르면, 처음에 ‘나’가 ‘당신’을 돕기 위해 비용을 감수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보답하지 않는다. 그러면 당신은 두배로 이득이다. 당신은 나의 이타주의에서 이득을 본다. 그리고 보답의 비용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 반면, 나는 두 배로 손해이다.
다른 조건들이 모두 같다면 이타주의를 지탱하는 유전자들은 가차없이 제거되고 이기주의를 위한 유전자들만이 선호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무임승차는 모든 사회적 종에게 고질적인 문제인데,이는 사회응집력에 매우 파괴적이고 공동체가 제공할 이익을 약회시킨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것이 언제나 핫한 이슈이다.)
이러한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일반적인 방법은 평판을 이용한 처벌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자를 처벌하도록 일종의 재판관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재판관은 헌법이라는 편리한 제도가 없다는 가정하에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매우 불쾌한 부담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때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마지막 대안은 모든 것을 보는 하늘의 경찰관, 신’이라는 절대적인 도덕적 감시자이자 심판관을 새우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간단한 이론이자 사회적 결속을 유지시키는 종교에 기능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유도될 수 있는 비판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 되어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득권층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를 겨냥하여(봉건시대 가톨릭, 자본주의 개신교)한 말이지만, 이는 기독교의 기원을 보더라도 단번에 반박가능하다. 종교는 엘리트가 아닌 가난하고 억업받는 자들, 박해받는 자들로부터 일어난 상향식 현상이다. 비록 종교가 나중에라도 국가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체택될 수는 있지만 종교의 본질이 인민의 아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향식’ 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오랜 전통을 이어서 내려온 세속 정치 혹은 하향식 강제의 경우, 엘리트의 권위를 억압받는 하위계층에게 강요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언제나 갈등을 유발하고 아무리 그것이 완화되어 직접적인 충돌이 아닌 민주적인 방법으로 발전했다 할지라도 이러한 긴장상태는 해소되지 않아 고질적인 사회의 불안정을 낳는다.
반면 개인이 자발적으로 공동체 기풍에 동참하는 상향식 헌신은 언제나 더 성공적인 전략이 될 것인데, 이는 단지 그 동기가 타인에 의해 부과되기보다는 개인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정확히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주목한 이유이다. 물론 무신론적이나 무교인 현대인들의 경우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의 전통이 의식화되어 있어서 이런 자발성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종교인들이라면 상향식 헌신이 어떻게 유지되며 또 강화되는지 체험해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상향식 헌신, 개인의 자발성을 일으키는 것은 첫째, 종교의 신비주의이며, 둘째는 종교의 인지적 조건인 정신화이다. 종교의 신비주의는 신앙의 대상인 신의 존재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인식시키기 때문에 특정 종교의 도덕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신비주의는 실제 이를 체험하는 사람에게 환상과 같은 몰입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죽음의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경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더욱 강하게 느끼며, 단순히 마약이나 주술의식으로 인한 환각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았으며, 이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의 짐을 이어받은 것처럼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 그로 인한 깨달음을 전하고 싶게 만든다.
정신화는 보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인데, 이는 자신의 마음 상태나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떠올리는 능력이라고 하는데, 총 5차까지의 단계가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3차 부터 종교적인 개념이 정립이 되고 4차부터는 개인적인 수준의 신앙이 생기고 5차부터는 공동의 종교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반드시 가장 높은 차원의 능력이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요구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러한 정신화 과정이 일어나는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서 조현형 심리를 측정하는 설문을 제시했는데, 정신화 과정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실제 신이나 귀신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강한 정신화 능력을 갖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종교의 사회적 기능(자벌적 헌신)이 갖는 이점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종교는 현대사회에서 쇠퇴하고 있으며 그리고 정교분리가 되어 세속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현재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줄어들어 상향식의 혁신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한 종교의 교리를 모두가 믿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자수를 지닌 가톨릭조차도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통해 각종 폭력과 강압을 수반한 비교적 최근의 역사가 아니었더라면 현재 이만한 위상을 떨치고 있었을지 모를 정도이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정교분리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물론 “세속 종교”를 만드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20세기의 인본주의 종교나 공산주의, 혹은 국가주의 체제 모두 전통 종교처럼 지속적이지도 본질적인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결국 종교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동네 교구의 소박한 커뮤니티 정도로만 만족해야 하는가? 오늘날 종교는 쇄신의 쇄신을 거듭하였다. 물론 성소수자 박해나 보수주의, 각종 역사적 과오 때문에 아직도 세속에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떨치기에는 갈 길이 멀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느님의 몫은 하느님께, 황제의 몫은 황제에게 돌리라( 마르 12:17)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느님의 몫은 황제 몫 이상이다. 황제의 몫은 기껏해야 세속의 자본이나 권력이겠지만, 하느님의 몫은 진리와 정의, 사랑의 영역이다. 황제의 몫은 언젠가 다른 적에 의해 물어뜯기겠지만 하느님의 몫은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로서 보편적 이타주의의 실천이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바다의 물처럼 보존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민주주의의 도덕적 권위가 점점 무너져가는 가운데 종교가 다시 부흥하여 적극적인 실천과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