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문명으로서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라는 글에서 한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제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는 조지프 헨릭의 서구 사회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내린 추론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 한국사회의 집단주의가 원자화된 것인지, 서구의 개인주의가 확대되면 과연 이상적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번 글은 한국의 개인주의나 이타주의(혹은 집단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판사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과 사회학자 최태현의 <이타주의자 선언.이라는 두 에세이를 통해 비교해 보고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한국인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는 그 둘 중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판사 문유석은 책의 프롤로그의 제목부터 ‘인간 혐오’라고 아주 시니컬하게 시작한다. 그는 한국사회에 견뎌야 하는 것들:눈치, 체면, 모양새, 험담, 공격적 열등감, 멸사봉공, 윗분 모시기, 위계질서의 관행, 관료주의 등등에 대해서 한탄하며 이들과 같은 인간 군상들이 그를 개인주의적으로 만드는 모습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톨레랑스를 지녔다면서 자신은 정 많은 휴머니스트라기보다는 도구적으로 최소한의 도덕을 찾는 현실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개인주의자로서 그가 언제나 맞이하는 물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가’이다. 그는 이에 대해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 타인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최고의 유용한 자원이며 그러한 까닭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는 불행을 낳는데, 그러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한다. 저자는 수직적 가치관과 서열화 과잠 문화가 불행을 낳고 있다고 예를 든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사회를 탈피하기 위해서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실증적으로’ 실적이 뛰어난 사회들을 본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독일, 미국 등등의 나라들이 그러하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여러 의문이 들었다. 과연 2020년대 한국에 그토록 집단주의가 아직도 만연한지, 타인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수단이라는 진화사회학적 결론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이 있지는 않은지, 실증적으로 뛰어난 사회들은 현재 극우 포퓰리즘이나 사회적 우울증, 트럼프주의등으로 혼란과 불행을 겪고 있는데 이들을 본받는 것은 과연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지 등등…. 하지만 일단 이건 개인적인 에세이이고 논문 같은 게 아니니까. 지금 당장은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반대 입장인 <이타주의자 선언>의 견해를 들어보자.
<이타주의자 선언>에서는 타인이라는 존재의 인식이 이타주의의 첫걸음이라고 한다. 이타주의란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겹치는 영역을 알아채고 신경 쓰며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를 구성하는 요소는 감수성과 그 영역을 넓혀가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이타주의란 내가 놓여있는 맥락을 이해하려는 능력이다. 이타심은 타인을 기어코 이 해려는 의지이다. 이때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집단주의(이기주의와 더불어서)와 이타주의를 구별하는 일종의 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희생인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도움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때로는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타주의의 영역은 예를 들어 생각해 보는 편이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평생 걷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무려 세브란스 의사에게 받았다고 한다. 그것도 100%의 확률로 말이다. 그 정도 전문가의 말인데 어떻게 틀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천주교 신자이셨던 어머니는 자신이 아는 모든 평신도를 포함한 수녀님, 신부님들에게까지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끊임없이 부탁해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들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해 주셨고 신부님들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내게 축복을 주시고는 하셨다.
사실 이분들이 자신들의 시간을 희생하여 나를 위해 기도해주지 않으셨더라면 자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 놀랍게도 평균적으로 다른 아기들보다 몇 달 늦기는 했지만 나는 100%의 확률을 뚫고 아무 문제 없이 걷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유아세례를 받았고 모태신앙인이다. 하지만 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기적을 베풀어주시면서 하나의 중요한 꺠달음이자 사명을 주셨다. 나처럼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았을 것이고 나와 같은 진단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지 못했을 것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걸을 수 있었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능력으로 희생을 하라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타주의에 대해서 많은 면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물론 학문적인 차원에서 나의 경험이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현대인은 개인주의와 이타주의 중 어떠한 것을 선택해 왔으며, 그것이 어떠한 문제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이는 나의 부족한 논거를 보충해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인은 세계가 아닌 자기 자신에 의존해 왔다고 말한다. 자아에 대한 배타적 관심 속에서 철저하게 세계에 대한 관심 없이도 세속적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가능해진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통해 서구인들이 그들 자신을 우주적 존재로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성의 힘에 의해 지상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데카르트적 회의는 근대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한편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나 자신 이외에 자명한 것은 없다는 명제는 진리가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는 전통 속에 만들어졌다. 즉 자기 자신의 외부의 존재는 모두 허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자신만은 신뢰할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인간이 외부에 대해 가지는 공통된 감각을 끊어버린 근대인들에게 남아있던 것은 자신들의 정신 구조뿐이었다.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되어 그저 무엇이든 계산을 할 수 있는 존재로만 변화해 버렸다.
문명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이렇게 진리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였던 인간마저 이제는 상대적인 존재인 것으로 드러나고 세계를 도구화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실존이 담보되지 않으며 개인의 쾌락 증진만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 근대 이기주의가 합리적인 도덕을 형성하게 된다. 개인주의가 반드시 이 복잡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맞닿아 있으며 특히 ‘합리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더욱 근접한 위치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주의는 사실 비이성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세계와의 단절이며 자아로의 도피에 가까운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개인주의는 발전과 혁신의 동력이 아니다. 이제 개인주의는 상대성 속에 부유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일 수 없고 개인도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를 통제할 수도 그 중심이 될 수도 없다. 그것의 증거는 인간중심주의의 정점에 이른 광기의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로도 충분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를 지금 따라가야 할 상황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들을 넘어섰거나 그들이 도달한 위치에 와있다. 우리는 이제 급속도로 근대화되어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근대 합리성 혹은 개인주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 것이다. 서구 세계가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덫에 걸려버린 이 끔찍한 저주를 말이다. 분명 한국의 집단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의 개인주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이기적이다. 그렇다면 여태껏 동서양을 막론하고 탄생시키지 못한 이타주의의 21세기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