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저널리즘

변혁적 중도라는 Romance(?)

by 최시헌

최근 창작과 비평을 구독하게 되면서 2025년 여름호에 실린 백낙청 교수님과 이남주 교수님의 2025년 체제에 대한 특별대담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요 주제는 변혁적 중도였다. 대담에 따르면 우선 정치권에서도 마침 이재명 후보가 더불어민주당의 이념을 ‘중도보수’로 규정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점과 변혁적 중도가 대전환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분수령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한다.


백낙청 교수님의 변혁적 중도라는 개념은 조금 난해하기도 해서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일단은 실천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의미에서 종교의 역할도 가져온 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중도보수와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한국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 골격인 것만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중도라는 입장은 언제나 한국의 정치 역사에서 소외받는 입장이었던지라 지금 와서 주목을 받는다고 해서 예전과 과연 얼마나 달라진 위상을 가지게 될지에 대해서는 나는 솔직히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런데 이러한 ‘대전환’과 관련해서 생각난 사건이 미국이 이란의 핵무기 시설을 폭격한 일이다. 뉴욕타임즈의 토마스 L. 프리드먼이라는 기자의 2025년 6월 22일 칼럼에 따르면 이란과 러시아는 이유가 있어 긴밀한 동맹이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해 우크라이나 군인과 민간인을 더 효과적으로 죽이도록 도왔다. 푸틴과 이란의 아야톨라들은 똑같은 세상을 원한다. 그것은 독재와 신정, 부패에 안전한 세상, 개인의 자유, 법치, 자유 언론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그리고 독립적인 이웃에 대한 러시아와 이란의 제국주의에 안전한 세상이다.


이러한 와중에 중국은 항상 양 진영에 발을 걸치고 있다. 중국 경제는 건강하고 성장하는 포용 세계에 의존하지만, 정치 지도부는 저항 세계와도 강한 유대를 유지한다. 그래서 베이징은 두 리그에서 모두 뛰고 있다—이란에서 석유를 구매하지만,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언젠가 신장의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에게 핵무기를 줄까 걱정한다.


지금 지정학적 측면에서 또 다른 기점을 맞이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중국은 이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놓인 것이다. 이른바 ‘포용세계’의 입장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저항 세계’와의 유대를 유지해나갈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한편 이 구도의 형식적 반대편인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정학적인 난전에 둘러싸인 미국은 국내 정세로도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뉴요커 라디오 아워라는 미국의 한 유명한 평론 잡지의 팟캐스트에서는 정경유착이 되어가고 있는 미국의 불평등을 논의하고 있으며 미국 각 계층이(부자들을 제외하고)이에 분노하고 있음에 공감하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뉴욕 시의 시장 후보가 미국의 급진 좌파(라고 자칭하는)인 버니 샌더스가 후견하는 사람이겠는가.


버니 샌더스는 미국 정치에서 드물게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진영과 일부 언론에서조차 샌더스의 정책을 사회주의라고 공격힌다 해도 실제 샌더스가 실제로 모델로 삼는 국가는 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즉, 시장경제를 인정하되 강한 복지와 공공서비스, 경제적 평등을 중시하는 모델들이다.


이러한 버니 샌더스의 입장에 대해서 지지하는 미국의 청년층들도 많은 편이지만 트럼프의 열성적인 MAGA들을 상대하기에는 아직까지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이며 트럼프의 광기에 찬 인종주의와 포퓰리즘에 대항하기에도 아직 미약하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국제적 상황에서 ‘중도’라는 선택지는 가능한 것일까?

이 맥락에서 비비언 고닉의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급진주의의 한계와 옛 것은 갔는데 새 것은 오지 않은 시대에 이데올로기적 역사의 사슬을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구술사를 통해 들려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실마리가 될 만한 텍스트이다.


비비언 고닉은 어릴적부터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 노동 계급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후 4시 반 어머니가 온종일을 열심히 일한 아버지를 위해 저녁식사를 차리던 기억은 일상 속에서 노동이 늘 그녀와 함께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비언 고닉의 아버지는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주는 삼촌들이었다. 아버지는 노동이었고 삼촌들은 자본이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고 삼촌들은 시오니스트들이었다. 세상은 계급의식이 있는 자들과 부르주아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것이 비비언 고닉이 어릴적부터 인식해온 세상의 구도(frame)이었다.


비비언 고닉의 아버지는 매일 친지, 동네 사람들과 사회주의 담론을 나누고는 하였다.그들은 빵집 트럭 운전사나 배관공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사상가, 작가, 시인이 되었다. 그들의 이 모든 맥락의 뿌리이자 중심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이곳에서는 사회적 박탈감이나 경계에 갇히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나 자아의 창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제 20차 당대회 연설에서 전 세계에 스탈린 통치의 헤아릴 수 없는 악행을 ‘폭로’했을 때, 매카시즘에 빠져있던 당시 미국의 좌파 탄압에 더불어 미국의 진보진영은 좌절과 절멸에 처하게 되었다.

비비언 고닉의 부모가 사회주의에 몰두한 현상적인 이유 너머에는 마르크스주의의 호소력이 가닿은 더 큰 욕구가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해서는 안된다는 우리 내면의 욕구, 삶의 정치성이라는 욕구가 말이다. 근대사회의 그 어떤 것도 공산주의처럼 전세계인들 안에서 열정가득한 공동의 꿈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내면에서 불이 켜지는 것, 그러다가 그 빛을 잃어버리는 것, 그 빛과 열기를 잃고 내동댕이쳐지는 것, 그 뒤 빛없이 캄캄한 일상의 평범한 일상의 회색을 맛보는 것, 그것은 어쩌면 깊은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을 잃고 어딘가가 부서져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황홀함과 공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p.43.


이러한 내면적 고백과 함께 비비언 고닉은 호메로스의 헬레네를 향한 파리스의 사랑이라는 신화를 소개한다.

헬레네는 파리스의 내면에서 성적인 사랑의 역량을 건드린다. 한번 건드려진 이 역량은 돌연 영혼의 허기로 스스로를 실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헬레네-그 굶주린 불타오르는 욕구의 대상,원인,근원-보다 그 욕구의 실재성이 더 커진다. 이제 그 허기는 자체적인 생명을 가지게 된다. 그 힘은 반사회적이고, 그 자체에 골몰하고 어울림의 법칙과 상충하는 내적인 법칙을 따른다.


그 당시의 공산주의는 헬레네의 역할을 수행하던 주체였다. 그 과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 위대함을, 그 비극의 웅장함과 추악함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이들은 여전히 회색빛 세계에 머문다. 어째서 옛 것은 갔는데 새것은 오지 않는가? 우리에게는 참고할 옛것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러했듯이 다시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비언 고닉은 왜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을 소환해내야 했을까? 그 해답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 나와 있다. 1968년, 비비언 고닉은 미국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초반 페미니즘의 힘은 사회 변화가 입법보다 의식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서 나왔다. 이를 통해 비비언 고닉은 인류에 대한 유대감이 재생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의식은 페미니즘 도그마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피억압계층은 하루 아침에 선명한 균형감각과 관대함을 갖추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이데올로기의 강한 인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는 걸 보았다. 그건 내가 몸소 경험하고 매일 같이 싸워야 했던 힘이었다. 모든 걸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단순한 이론으로 싸잡아 설명하려는 유혹은 얼마나 강렬한가. 우리 앞에 놓인 경험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진실을 직시한다는 건 얼마나 입맛 떨어지는 일인가. 그리고 나는 정치적 수사가 ‘저밖에’ 있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 무기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p.454


이러한 도그마는 정확히 우리가 한국 정치에서 팬덤 정치와 급진주의가 초래한 여러 가지 위기와 파국에 일치한다. 우리는 서로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라치며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산당원들에 대해 반발하면서 내렸던 판단들에 관해 생각했다. 마치 내가 그 긴 세월 동안 고요한 바다처럼 보이는 큰 물가에 앉아있었던 것만 같았다. 저 멀리, 바다가 하늘과 만나는 수평선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부드럽게 수영을 하는 대신 물 속에서 요란하게 첨벙거리고 있다. 너무 꼴사납잖아.나는 생각한다. 서투르고, 어설프고, 자신과 서로에게 위험한 짓이라고, 저사람들이 수영을 한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세 살짜리도 저것보단 잘하겠어. 그리고 나는 물가에서 일어나 물 속으로 들어가고, 그곳이 그냥 바다가 아니라 거대한 대양임을, 사나운 해류와 마음 놓을 수 없는 저류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평선에서 첨벙대던 사람들은 그저 물 위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하다는 걸, 이제 나는 알게 된다.”p.457~458


수평선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비유처럼 비비언 고닉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사슬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19세기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그 다음 세대 사회주의자들의 맹렬한 정치성, ㄱ리고 현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전과 도그마에 관해 얻은 깨달음들까지. 하나의 전통 속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과오를 쇄신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보이다. 지금 우리는 산통하는 여인처럼 아파하지만 우리의 시대를 낳은 다음에는 그 시대가 인류의 운명을 써내려갈 것이다. 이것이 비비언 고닉의 결론이다.


엄밀히 말해서 비비언 고닉은 우리가 중도를 취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도그마의 비극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이데올로기, 사상이란 하나의 전통이므로, 아무리 우리가 전환기를 맞이한다고 해서 과거와 완전히 단절될 수도 없다. 비록 앞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너무 짧기 때문에 참조할만한 것도 없을 뿐더러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명 이념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 그 위대한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역사는 다른 어느 민족 못지 않게 오래되었고 특히 지난 20세기 후반에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웠다. 우리는 87년 체제만 찾으며 개헌만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변혁적 중도가 나오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우리의 투쟁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철저히 성찰해야 할 것이다.

20240509503979.jpg 비비언 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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