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자유Freedom>(2025)는 그동안 수없이 쓰여왔지만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자유’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하여 다양한 정치 철학, 신학, 형이상학적 사상들을 넘나들며 사유한 저작이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이 이 책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서문에 보면 그보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내용이 있다.
글의 시작에 그는 2021년 중국의 카메라 공장 수리공인 첸지가 대학교 2학년을 자퇴하고 노동을 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날 때마다 하이데거의 저서를 읽고 중국어로 번역을 했다는 일화를 들려주면서 철학이 단순한 학문 이상임을 보여주는 ‘기적’을 보여줘야 한다며젊은 사상가들의 열정적인 사유를 권하고 있다.
인문학이 전세계적으로 무기력한 시점에 이같이 환상적인 선언은 가뭄에 단비 같은 응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판타지’스러운 기적이 사상계에 일어나지 않는 지난 세기를 휩쓸었던 사회주의만큼의 파급력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기후위기와 전쟁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치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글에서는 브라이언 애터버리의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와 앞서 언급한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라는 저작을 통해 우리의 자유는 어떻게 흘러왔으며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판타지 소설을 장르 소설이라고 따로 구분하고 사실주의 소설을 일반 소설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판타지는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먼저 이미 많이 알려진대로 판타지에서 신화는 일종의 세계관으로서, 전통적 신념과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측면에서 한 사회를 설명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판타지의 구조는 세상의 형태를, 그 변화의 형태를 말 그대로 공간적 차원에서 반영한다. 판타지는 그러한 의미에서 형태보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사실주의 소설들은 한 개인의 내면을 묘사하는데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말이다. 다만 판타지 소설들은 작품의 개별적인 세계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용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한편 판타지가 사실주의와 대조적인 것은 아니다. 가정성이라는 개념에 따르면 어떤 소설이나 판타지이든 일정한 조건 하에 경험에 충실하고 진실에 어느 정도 기반하며 몇몇 진실을 입증하는 한에서 현실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서 이 둘 사이에 핵심적인 차이가 드러나는데, 판타지는 전통적인 형태, 공식(formula)의 계승을 중요시하는 반면 사실주의는 그러한 공식을 ‘위장’하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유기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주의는 사실적인 척 하는 우월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결국 어떻게 해도 공식 그 자체에서 벗어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타지와 사실주의의 특성은 실제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세월 동안 판타지는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반대로 정치는 갈수록 퇴보하였다. 그래서 지난 몇십년간에는 판타지가 보다 진보적이고 정치가 더 보수적으로 가다못해 극우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판타지는 전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공식의 계승이 자신의 정체성이다. 판타지의 세계는 언제나 익숙한 과거(원형)를 재구성할 뿐, 미래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원형의 세계, 우리를 언제나 본질의 영역으로 바로잡아 주는 판타지마저도 현재의 혼란스러운 정치성에 휘말린다면 아직까지는 진보적일 수 있는 판타지도 극우적으로 이용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판타지는 계승하는가, 전복하는가? 판타지가 계승하기를 포기하고 전복적 장치를 선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러한 문제는 자유에 대한 사유의 역사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자유>의 한 챕터에서는 헤겔과 칸트의 절대악에 대한 철학에 대해 논하는데, 여기서 헤겔적인 관점에서의 ‘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기독교에서 신의 죽음은, 가령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초월적인 신 자신이 죽은 것이고 부활에서 살아남은 것은 성령이고 그것은 공동체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이다. 즉 부활은 실재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 내면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즉 영적인 개념 안에서만 신은 끊임없이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되살려지고 있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이 ‘악’이란 자연과 대립하며 생겨나는 이성적 사고라고 했음을 인용하며 이렇게 순수 영으로서 끊임없이 되살려지는 신은 오히려 최고악이 되어버린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죽음은 절대악으로서의 신이 자기 이외에 모든 것을 타락했다고 보는 시선 그 자체로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은 그러한 자신과 신이 화해 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지젝은 묻는다: 이미 신은 죽었고 남은 것은 공동체일 뿐인데, 어째서 기독교의 신자들은 물질적 외양에 집착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 판타지의 문제에 비추어 지젝의 주장을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첫째는 신의 죽음과 사실주의-판타지의 관계이며, 둘째는 신의 부활과 관련된 신앙 그리고 계승 혹은 전복의 관계이다.
먼저 첫 번째 신의 죽음이 초월적인 신 그 자체의 죽음이라고 성령으로서의 신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유물론자인 지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를 사실주의와 판타지의 관계에 비추어 보면 결국 사실주의가 판타지와 공존하며 나아가 그 원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언뜻 보면 이미 실재적으로는 죽은 것 같아 보이는 신도 영적으로 살아있음으로써 그동안 자신이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만들어온 역사를 공동체의 신앙을 통해 계승해 나아가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판타지가 현실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가 기독교라는 점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같은 맥락에서 신의 부활과 계승 혹은 전복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왜 기독교인들이 물질적 외양에 집착하는가? 라는 지젝의 물음에는 굳이 답하지 않겠다. 다만 일단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부터가 신에 대한 물질적 외양에 대한 집착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만 말해두고 싶다.
그러나 계승 혹은 전복의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지젝의 말대로- 신은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할 뿐이지 현실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라고-생각한다면, 그래서 신의 부활 같은 건 그냥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치 판타지가 전통적 공식을 계승하기를 포기하고 전복하기만을 추구할 때 우리의 문화적 기반이, 정신적 근본이 흔들리거나 심지어는 무너지듯이 기독교인들 또한 그렇게 몰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독교라는 서구 세계의 근본적인 윤리적 틀, 최후의 보루가 몰락한다면, 지젝이 발딛고 있는 사상이 거쳐온 역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젝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 기득권층이 우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마치 자유인 것처럼 느끼는 비자유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전복적 사유의 과잉이야말로 이 시대에 진정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전복적인 시도들이 우리의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채 발생한다면 서로간의 갈등만으로 치닫게 될 뿐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전복할 테니 말이다. 그러한 도미노에서 살아남을 사상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에 전복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을 읽는 도중에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