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저널리즘

<휴먼카인드>(뒤르헤르 브레흐만) 리뷰

현실낙관주의라는 냉소주의

by 최시헌

현재 유발 하라리가 찬사를 보내는 저서로 유명한 이 책의 주제는 현실낙관주의이다. 인간 본성의 선함을 역사적 과학적 측면에서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들이 대공습을 당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당국은 수백 명의 민간인이 압박감에 굴복할 것이며 군대는 히스테리에 빠진 대중들로 인해 손 쓸 틈이 없어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런던 지하에 그물망처럼 방공호를 건설하는 최후의 계획을 검토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공포에 마비된 시민들이 다시는 방공호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1940년 9월 7일, 348대 독일 폭격기가 런던 대공습을 감행했다. 8만 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100만 채의 건물이 파손되거나 파괴되었고 영국인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나라가 몇 개월 동안 계속 폭격을 받으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캐나다의 정신분석학자가 1940년 10월 자동차를 운전해 런던 남동부를 지나갔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폭탄 터진 자리와 건물의 잔해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목격한 영국인들은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에 더해 영국인 특유의 독한 유머 기질로 공습에 대해 정신적 저항을 하였으며 정신적 황폐화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의 자살률이 줄어들고 알코올 중독이 개선되는 등 전반적인 정신건강이 향상되었다. 많은 영국인들이 서로를 도왔으며 아무도 정치적 입장이나 빈부여부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두고 작가는 영국인만의 특성이 아닌 인류 보편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있다. 당시의 대영제국은 세계 초강대국이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한꺼번에 패닉에 빠질 만큼 국력이 약할 리가 없다는 말이다. 교육 수준, 경제적 여력, 위생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중일전쟁에서 일본인이 중국인에게 가한 대학살과 인체실험은 어떤가? 그로 인해 생긴 빈곤으로 식인이 창궐했던 현실은? 혹은 한국의 6.25 전쟁 때 각 진영이 돌아가면서 자행한 학살은 어떤가?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마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감시했어야 했던 일들은?

저자는 런던 대공습 이외에도 미국에서 일어난 2005년 카타리나 허리케인이나 타이타닉호에서와 같은 극단 상황에서도 인간은 이타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문명은 아주 가벼운 도발에도 갈라져버리는 얄팍한 껍데기와 같다는 껍데기 이론을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명’을 대표하는 국가는 무엇인가? 영국과 미국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스라엘로부터 학살을 당하는 가자지구나 러시아의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는 인류문명에 속하지 않는 것인가? 저자의 주장이 문명제국주의는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그럼에도 자신이 인간이 천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하지만 좋은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 애초에 본성론이 인간의 선악을 정한다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가 보았다시피 저자가 제시한 선한 본성의 사례는 강대국이나 선진국에서 나타날 뿐이다. 이러한 곳들은 윤리적 맥락을 배제한 힘의 논리가 날뛰지 않도록 규제하는 법적 구속력과 정치적 전통이 강하게 확립되어 있는 곳들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나 아프리카 내전 등이 일어났던 시기와 장소는 그렇지 못했다.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지의 여부가 인간의 악행을 발생시킬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이론으로 접근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그러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따르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선함을 지니면서도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의지에 의해 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본성'이라는 결정론은 그다지 단정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일 뿐이다.

즉 사람의 본성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해 선함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바꾸려는 저자의 시도는 좋았으나 구체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는 없다. 차라리 본성이나 인식과 같은 선험적 측면에 기대는 것이 아닌 사회, 문화, 정치에 걸친 힘의 논리와 이익관계를 타파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현실의 탈을 쓴 냉소적인 낙관주의이다. 그는 종교, 사상, 뉴스 등 인류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어주는 기둥들이 부정적인 염세관을 불어넣은 주된 범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뉴스의 진실이란 잔혹한 것이 아니라 진실은 그 자체로 마주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종교가 신성시하는 것은 성악설이 아니라 인간을 의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믿음과 희망, 사랑과 같은 미래지향적인 가치들이다. 사상은 타인들을 배제해 온 것이 아니라 타인들을 포용하는 범위를 넓혀나가는 거친 투쟁의 산물이다.

유일하게 저자와 내가 의견이 통하는 부분은 힘의 논리가 인간 악행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희망을 믿고자 하는 의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과정에서 나는 저자에게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현실 낙관주의는 아무리 긍정적이라도 편향된 환상이며 그렇기에 잔인한 낙관이다.

그리고 인간이 선함을 행하도록 돕는 주요한 사회적 배경들을 비난한 철 지난 루소 예찬은 맥락에도 맞지 않는다. 모든 베스트셀러가 고전이나 명저가 될 수는 없듯이 때로는 세계적인 석학의 칭찬을 들은 책이라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공부를 했다던가 더 아는 게 많은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건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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