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저널리즘

<민족>(아자 가트)/한류와 헤게모니

by 최시헌

8.15 광복을 맞이하여 두 번째로 생각해볼 주제는 최근에는 케데헌(케이팝데몬헌터)로 대표되며 다른 수많은 인기 컨텐츠들을 포함한 한류가 지니는 헤게모니적 영향력. 그리고 한류에는 한국의 정신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는지와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 아자 가트의 연구이다.


한류와 헤게모니에 들어가기 앞서 그 기저에 깔려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룬 아자 가트의 설명을 먼저 보도록 하자. 기존의 민족주의 연구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하나는 근대주의자이고, 하나는 전통주의자(원초적primordial)이다.


근대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민족은 19C 유럽 프랑스 혁명 및 산업 혁명 혹은 그보다 앞선 근세에 출현했다. 소규모 농촌 공동체에 갇힌 채 넓은 영토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많은 인구를 한데 결합시킨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동원과정의 산물이 바로 민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은 근대국가의 적극적 유도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반면 전통주의자는 실재이자 정서로서의 민족태(nationhood)를 주장하며 민족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어떤 국가적 계획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정서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자 가트는 둘 중 어떤 것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민족은 근대성이 아니고 또 단순히 민족을 정서로만 취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측면이 있다면서 전통주의자의 한계도 지적한다. 또한 그는 민족주의의 기원보다도 종족성과 민족주의의 ‘폭발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궁극적인 질문에 천착했다. 그에 따른 그의 결론은 민족주의와 종족성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정치적 종족성이라는 좀 더 광범위한 현상의 한 형태로. 종족성은 언제나 고도로 정치적이며 친족과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다. 근대주의자는 민족이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역사상 소국, 국가, 제국을 포함해서 민족이 중요하지 않았던 국가는 없다.


소국의 국민들은 종족적으로 가깝다. 여러 소국들로 쪼개진 더 넓은 종족공간의 일부일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종족적으로 가까운 집단 거주 공간은 통일과정을 촉진하고 더 큰 국가로의 성장과 확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통합 이후에는 통일 그 자체의 현실의식적인 평준화와 융합노력을 통해 자기 영토의 종족적 통합을 강화한다. 종족의 융합과 분열은 집단의 경계와 정체성을 거듭 재형성하며 끝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시민적 민족주의, 즉 근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가영역-문화 측면의 민족주의도 종족적 민족주의,혈통-공유문화의 민족주의라는 전통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시민적 민족 내에서 심지어 혈통을 공유한다는 정서가 없어도 문화적 통합 및 통혼에 의해 친족적 감정이 발생할 수도 있다. 민족주의는 마음의 상태라고 아자 가트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체적 정치적 정체성과 친밀감,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식으로서의 종족성은 어디서 오는가? 이에 대해서는 문화와 친족 감정을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전근대의 종족민족적 정체성의 심도가 발달한 과정을 보면 언어와 종교 사상과 종파가 어우러지며 만드는 상상된 공동체가 바로 종족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자 가트에게 남은 질문은 그래서 시민적 민족과 종족적 민족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경계에 서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캐나다나 미국과 같은 다문화 사회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이민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시민적 민족, 국가 주도하에 생성된 민족성의 결정체라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시민적 측면은 종족적 측면에 암묵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앞서 말했던 전근대의 종족 민족성을 깊이 해주는 요소들인 언어와 종교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영어로,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로 표준어가 영국계나 프랑스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 차지하는 비율이 아직까지도 압도적으로 개신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이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그 특정 종족의 민족 건설에 기여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받아들인 여러 서구의 문화나 심지어 중심적인 정치체제인 민주주의조차도 특정 종족의 민족주의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아직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식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가령, 영국계 미국인의 제국 건설을 돕고 있는 것인가? 한민족,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정체성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혹은 존재하더라도 일부만이 덧칠해져 편재하는가?


이에 대해서 주로 다뤄지는 대안적 담론 중 하나가 한류이다. 한류는 유례없이 전세계적으로 압도적인 문화적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는 도리어 해외의 한류 팬들이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워 한국에 이민을 오는 현실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도저히 대중문화로만 취급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이를 헤게모니 차원에서 다루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실제 해외 언론과 방송의 관점에서는 한류는 한국 정부의 오랜 결과물, 즉 국가주도형 콘텐츠이다. 그러나 <한류는 문화민족주의의 산물인가>(이동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이는 한류의 문화적 위상과 가치들을 평가 절하 하려는 포스트 오리엔탈리즘을 내포한다.


게다가 이미 K-pop의 글로벌 팬덤, 다국적화된 아이돌 멤버, 탈국적화된 넷플릭스,디즈니 플러스 등의 해외 자본들이 한국의 영상 컨텐츠들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해외 언론의 주장은 현실과의 괴리가 있는 주장인 것이다. 논문의 저자는 이러한 괴리 현상은 국민국가적 자부심의 계기가 되는 K-pop의 탈국적화된 팬덤 사례들로부터 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한류 문화 민족주의는 대중들이 스스로 만든 심리 기제(속된 말로 국뽕)이다.


그런 한편 대중문화는 헤게모니적 투쟁이 발생하는 주된 장이라고 보는 그람시적 관점도 존재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따르면 헤게모니란 어떤 지배블록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지지와 동의를 획득하면서 행사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지도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지도력을 가능케하는 특수한 관점들의 체계이자 세계관이다. 대중문화 또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는커녕 직간접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므로 헤게모니적 투쟁의 장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의 그 유명한 나의 소원에 나오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도 잘 나와 있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그래서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의 소원을 이루었는가? 물론 한류는 초국가적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치는 문화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류의 여러 타 문화가 섞여 있는 혼종성과 다국적성 혹은 글로컬리즘은 한국만의 문화라고 보기에는 차라리 자본주의적 상품화로서의 음악 혹은 콘텐츠와 거기에 1% 정도 한민족적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앞서 아자 가트는 ‘상상된 공동체’의 요소로서 언어와 종교라는 인류의 근본적인 사상 체계를 꼽았지만, 사실 우리를 우리로서 묶어주는 ‘서사’ 혹은 ‘상상된 것’은 관념적인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가령 탈식민의 역사를 거치기 전의 동아시아와 그 후의 동아시아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억압, 이데올로기적 혼란, 기존 민족 정체성의 상실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남한이든, 중국이든 모두 서구 세게와의 조우라는 시대의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동아시아인 모두가 역사로서 공유하는 ‘뿌리’의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새 뿌리를 내리울 때에야 비로소 한류는 한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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