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탈식민의 역사를 거치기 전의 동아시아와 그 후의 동아시아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억압, 이데올로기적 혼란, 기존 민족 정체성의 상실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남한이든, 중국이든 모두 서구 세계와의 조우라는 시대의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동아시아인 모두가 역사로서 공유하는 ‘뿌리’의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새 뿌리를 내리울 때에야 비로소 한류는 한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세계와의 조우가 동아시아에 역사적 상흔을 남겼다는 사실은 식민 통치와 전쟁범죄 등으로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공동의 사상적 뿌리란 무엇인가? 몇 천년을 이어온 동아시아의 가치관이 단 한 세기만에 바뀔 만큼 우리의 정신적 바탕은 빈약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먼저 그토록 단 한 세기만에 동아시아의 가치관을 바꾼 역사적 배경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서구 제국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에 이어지던 19세기에 영국이 동아시아의 최대의 시장이었던 중국을 아편전쟁으로 굴복시키고 1842년 난징 조약으로 5개 항구를 개항한 사건과 일본이 미일통상수호조약으로 역시 1858년 개항한 사건, 그리고 1876년의 조일수호통상조약으로 쇄국 정책의 끝에 이뤄진 조선의 개항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기적 변화를 보면 서구 세력의 동아시아에 대한 외압이 언제나 일정하지는 않았다. 서구 제국은 1848년에서 1865년 사이에 심각한 내부적 모순을 겪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동아시아에서의 외압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내란과 외환 속에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일본은 상대적으로 외압의 강도가 낮아지면서 외압과의 대립보다는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채제를 개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성장이 미숙하던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던 조선에 가해진 외압은 다른 어느 식민지 국가에서보다도 폭력성을 띄게 한 원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개항 이후 조선에 외압을 직접적으로 가한 외세는 일본과 중국이었다. 양국은 이미 서구 열강에 의하여 제죽주의적 침략을 받으며 근대로의 급속한 이행을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자국 내부의 모순을 조선에 전이하여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밑거름 삼고자 했다.다시 말해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청과 일본의 원시적 축적형의 외압에 직면하여 ‘이중의 외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 갈등 가운데 격동은 동아시아 전통사회 전반에도 변화를 강요했다.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새로운 사유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을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했기에 전통의 연속선상에서 근대를 수용하는 새로운 인식론을 필요로 하게 된 삼국은 각각 중체서용, 동도서기,화혼양재 등 자신들의 전통 이데올로기는 지키면서도 서구 문명의 이기는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구의 이기를 받아들일수록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은 당시의 근대화의 과정과 열강들과의 경쟁에 필요한 사회이론을 찾고자 했다. 그들 중 대표적으로 떠오른 것이 사회진화론이었는데, 주로 스펜서와 다윈의 이론이 수용되면서부터 이 담론은 각국의 상황에 맞게 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가토가 생존 경쟁과 우승 열패 적자 생존이라는 말로 진화론의 용어를 번역하면서 개념어를 만들어내어 사회 진화론이 조명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진보발달도 생존 경쟁과 자연도태에 연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우승 열패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므로 자유의지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옌푸가 영국에서 유학해서 배워온 생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사회진화론에 대한 담론을 전개했다. 옌푸 역시 사회진화론과 같은 자연적 원리가 사회에도 유기적으로 적용되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인간은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토와 달리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도 인정함으로써 약자의 저항이라는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그러나 냉혹한 국제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는 옌푸의 제자인 량의 약육강식, 즉 일본 사회진화론에 가까운 담론이 더욱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한국의 신채호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민족간의 ‘세력’의 우열을 중심으로 하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 적자 생존의 경쟁사회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동아시아 청년들의 공통된 문제와 겹쳐보인다. 압축된 근대화를 위해 압축적으로 극화한 경쟁주의는 오늘날 청년들을 능력주의와 여러 사회적 갈등 속에 방황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살아왔기에 어느 순간 방향 잃은 열정이 식은 다음에는 번아웃에 빠지게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는 아직도 제국주의의 PTSD 속에 살고 있다. 여러 세대가 지났음에도.
그러나 여기서 나름대로 동아시아에 만연한 극단적인 경쟁주의를 해소할 이론을 찾는다면 나는 ‘자연’에 대한 왜곡된 시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진화론은 초기 사회학 이론의 특성상 자연의 유기성이 인간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 자연이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와 서구 사회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이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강의>(신영복)에 따르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서 동아시아 사상에서 최고의 질서이다. 마치 우주와도 같아서 그 어디도 중심이 아니며 모두가 모두에 의해 구성이 되기에 생기의 장이라고도 불리며 생주이멸의 순환이라는 원리로도 설명된다. 그러니 동아시아의 전통 사상에서는 서구사회처럼 존재의 문제나 인본주의의 문제보다 관계들의 총화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다만 유가는 도가와 달리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서구의 Nature은 유물론적인 존재이며,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인간이 그 정점과 중심을 차지 하고 있으며 관계의 총화라기보다는 차이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이마저도 최근 인류세나 포스트휴머니즘이 도래한 걸 보면 오히려 동아시아의 전통적 사상에 가까워지는 게 아닌지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류가 동아시아에 새로운 역사적 뿌리를 내리는 방법은 이러한 관계의 총화로서 문화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사상으로 우리에게 박혀있는 우승열패의 도끼를 빼내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