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조선에 이은 탈닛폰?
저자의 프롤로그에 따르면 일본 청년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포기'를 선택한 청년들이다. 이들은 욕망을 최소화하고 소확생을 추구한다. 이는 가난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업의 과도한 위계와 책임을 견디지 못해 프리터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는 ‘거부'를 선택한 청년들이다. 침체된 시장과 희망없는 세습정치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선진국이나 성장가능성이 있는 동남아로 탈출하는 현상을 말한다.
오늘날 일본의 청년들은 사회에 갓 진입하자마자 하류층, 이른바 언더클래스로 밀려난다. 일본의 ‘상위 10%’ 중심 격차 구조가 고착화되는 중이다. 일본의 MZ세대들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경제 성장을 실감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30년 동안 일본의 임금인상률은 고작 4.4퍼센트였다.(한국은 같은 기간 90퍼센트 이상 성장했다.) 일본의 정규직이 받은 월급이 호주의 정규직과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받는 월급보다 적다고 한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전체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바람에 청년 세대의 세금 부담이 높아지고 연금,의료,지역 정치 참여등이 고령층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미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일본이 여기까지 이른 맥락은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 경제적인 이유로 정리하자면 아베노믹스의 실패와 30년에 걸린 경제 침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지속되어온 부도+신용경색+유동성 함정 등이 잃어버린 30년을 만들었고 아베노믹스의 양적 완화 정책들은 외려 비정규 노동자를 더욱 궁핍하게 만들고 일본 경제의 하층민인 언더클래스들을 양산했다.
이들 하층민들은 다른 말로 하면 사토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흡사 한국의 N포세대와 같이 도전을 불필요하게 여기며 희망이 의욕이 없어 소극적이다.30년 불황은 신일본계급 사회를 만들어내 격차를 확대하고 부자에게 돈이 집중되게 만들었다. 여러 경제적 악순환이 겹쳐 만들어진 언더 클래스들은 계층 간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정치적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며 사회비용이 증가하게 만든다.
지난 5년간의 일본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아베 내각이 실각된 이후 스가가 취임하여 아베의 노선을 지속하려 하였으나 코로나 19 대응에 미흡하였고 정치 자금 쪼개기 기부 의혹, 정넘의 총무성 간부 접대 사건등으로 1년만에 사임하였다. 기시다 총리가 취임하였을 때는 자민당에 리버럴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이른바 극장형 정치의 일환으로 미디어로 일본정치의 보수성을 감추는 얼굴마담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22년 자민당과 통일교와의 유착관계가 발각되면서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이런 얼굴 바꾸기의 피상적인 정치는 민생위기 극복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런 무의미한 정치계의 혼돈이 진행되는 동안 청년 고독사는 늘어가고 있었다. 가구당 평균 가구원 수는 1.99명이었으며 이런 독신 가구가 2050년에는 60퍼센트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경제 침체기에 이미 신입사원 채용규모를 축소하였던 탓에 취업방하기 세대가 탄생했고 그만큼 니트족이나 프리터가 증가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더해 91년생 다카하시가 2015년에 하루 20시간 노동과 상사의 고압적인 태도에 자살하는 사건이 터져 이 심각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국 청년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떠나간 일본은 지방소멸이 본격화되고 있다. 절망적인 것은 해외로 나간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명문대 학생들도 이 상황을 직접적으로 타개하기에는 일본의 경제 현실이 저성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사회구조의 개편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성장보다는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 청년들에게 답답했던 것은 사회구조의 개편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들 자신의 힘으로 세습정치의 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립하는 등의 ‘혁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촛불시위에 더해 최근까지도 계엄을 막고 윤석열을 끌어내리기 위해 시민들의 광장으로 나왔지만 나는 일본의 청년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낸 사건을 들어본 적이 없다. 조금은 모욕적일 수도 있지만 정말이지 여기서는 개나 소나, 극좌나 극우나 혁명을 부르짖고 있는데 일본은 고요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국의 청년들도 지난 세대의 민주화의 유산이 없었다면 이런 에너지의 창출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경쟁적인 능력주의 교육 아래 길러진 우리들은 경쟁적인 취업시장에 뛰어들어야 했고 우리의 핵분열은 기성 세대를 먹여살리는 스파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갈수록 지쳐가고 있다. 일본도 능력주의 교육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근대화 초기부터 2001년 신자유주의 정책의 도입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이 이런 극단적인 반전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의 역동성의 유무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이 민중에 의한 투쟁을 이어가는 동안 일본은 호황 속에 사회적 안정을 추구했다.그러나 곧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경쟁 대상은 전 세계가 되었고 국내 정치에 대응하기에도 바빴던 일본은 국제적인 경쟁력을 잃었고 아베노믹스의 내수용 정책에 말려들었다. 결국 남은 일본의 특권층들이 마치 항아리 속의 뱀들처럼 지독한 사투를 벌였으나 그들 중 몇몇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쇄신을 실패한 세대 교체가 낳은 비극이었다. 한국도 일본도 사실 별로 입장이 다르지 않다. 요즘 언론에서 일본은 우방국이라거나 혹은 한국의 사회적 반면교사라고 하지만 진정으로 양국의 청년들이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세계가 있다면 우열을 가리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서로 연대하는 혁신집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