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계속해서 우승열패라는 제국주의적 상흔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우승열패라는 권위적 사상에 대항하려니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우승열패는 자연을 근거로 만들어낸 ‘법칙’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윈조차도 부정한 우승열패는 어떻게 현대에까지 살아남았는가? 어쩌다가 단지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는 안되는 당위가 되버린 걸까? 이에 대해서 <도덕을 왜 자연에서 찾는가?>라는 로레인 대스턴의 글을 인용하며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연을 인간 행위에 대한 규범의 원천으로 보는 사람들의 실수는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이는 자연은 단순히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당위로 바꾸려는 인간 행위의 강요나 투영이다. 본래는 문화적 가치였던 것을 자연에 비유한 다음 그 은유를 바탕으로 자연의 권위를 빌려오는 방식이다. 본래 과학은 기술적인 것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과학을 ‘사용’하는 인문학자들은 이를 규범적인 근거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성향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번역한 중세 철학자들만 해도 과학이 보편적 지식에 대한 인과적 역할은 할 수 있어도 과학 자체가 자연이 될 수는 없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다만 자연에는 오히려 불완전한 규칙성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없어 표준적인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법칙의 개념(동질성,보편성,불가침성)이 등장한 것은 17c 중에 신학,자연철학,응용수학이 엉켜 있던 실타래로부터 출현했다. 신을 자연에 법칙을 시행하는 신성한 입법자로 여기는 주의주의적 신학이 유행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떻게 사유하지 않는 물질이 의식적인 동의가 필요한 법률에 순종하는가와 같은 존재론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때 시계를 이용한 유추는 불가침적인 자연법칙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시계의 정교함을 보고 이 세상도 신에 의해 제작된 엔진과 같은 기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의 모든 상황을 대비한 엔지니어는 자연이라는 자연을 중단시킬 필요가 없다. (무한히 지속된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규범성을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을 정의내렸으며 도덕적 질서 뿐만 아니라 질서 일반의 근거를 자연에서 얻는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이 자연주의적 오류이며 절대적인 도덕적 권위를 가질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우승열패라는 유사진화론 혹은 신자유주의적 규범성도 반박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부족하다. ‘왜’ 이들은 자연에 집착했을까? 왜 이들은 자연의 ‘정복’과 ‘도태’를 끊임없는 시계바늘처럼 생각했을까? 자연이 무엇이길래? 진작에 미신과 여러 신화로부터, 심지어 기독교로부터도 벗어난 당시의 유럽이 자연에 어떤 신비가 있어 절대적 권리를 지닌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 말은 유럽은 제국주의가 한창일 19세기 20세기 초의 유럽을 말하는 것이다. 17c 순진한 주의주의적 유럽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서는 아미타브 고시의 <육두구의 저주>를 참고해보려고 한다. 14장의 성스러운 불만의 천사를 보면 기후정의에 대한 극우주의자들은 맬서스식 교정, 즉 가난하고 탄소도 거의 배출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해야만 소비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끝없는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고 지구의 자원은 이미 고갈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언급되는 것은 신자유주의는 이 맬서스적 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말살하는 것은 이기적 사익 추구가 인간 본성의 보편적 특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논리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승열패는 자기실현적으로 그 영향력을 뚜렷이 누리고 있다.
이러한 말살 개념은 ‘열등한’ 인종에 대한 19세기 백인들의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에 유래한다. 그 당시 비유럽인을 불렀던 호칭은 야수(brute)였는데, 이는 갈수록 변질되어 아예 인간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자연(Nature)으로서 표현되기 시작한다.
즉 그 당시의 열등 인종은 소수자였고 소수자는 도태된 자연이었으며 오늘날 환경위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나 정치 사회적 소수자들을 혐오하며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극우주의자들은 그러한 ‘자연’으로서의 열등종들을 말살해야 주장하는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오늘날 법적으로는 누가 야수이고 누가 완전한 인간인지는 구분되지 않는다. 현대에 이르러 야수들은 더이상 야수가 아니다. 야수들이 ‘사실’로서의 서양의 ‘생물학적 우월함’을 ‘당위’로서의 목적지로 따라감으로써 야수는 길들여졌다.
오히려 이 길들여진 야수들이 때로는 더욱 제국주의적 행위를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은 백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시간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던 탓에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야수인지 완전한 인간인지 잊어버리게 되거나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돈이 없고 힘이 없었지 역사가 없고 자아가 없는 민족들은 아니었다. 오랜 역사와 사상을 가진 민족과 국가들이었는데 그것이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절대적 허구 앞에 쓸려가버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자존심을 꺾게 한 것은 단순히 막걍한 군사력이나 자본과 정교한 정치 시스템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그리고 그러한 언어가 구성하는 서사를 억압했다.
국제 질서의 복장성을 이해하려면 타국의 언어를 번역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언어는 그들의 시녀가 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리고 주변부가 된 우리의 서사는 중심부가 새로 짜준 대본을 읽어야 한다. 우리의 모어가 쓰이지 못한 순간 우린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채로 야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새 세기의 과제는 우리만의 문학과 사상을 만드는 것이 되었지만 20년이 넘도록 동아시아의 사상은 아직 길을 잡지 못하고 있다.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닌 인간의 규범성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