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저널리즘

갇힌 중국인들과 열린 시진핑

by 최시헌

중국 전승전에 대한 기사들은 북중러가 신냉전의 주역이 될 것을 경고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회담에서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가지고 기록된다. 하지만 중국에는 시진핑만 살지 않는다.


<슬픈 중국(대륙의 자유인들 1976-현재)>에 따르면 공산당 독재로 운영되는 레닌주의 국가 중국은 절충과 봉합의 오랜 통치 방식으로 살아남아왔다. 상충되는 이념들을 적당히 뒤섞어 모순되는 제도들을 교묘하게 끼워맞춰 봉합하는 중화 문명 특유의 전략은 개혁개방 이래 중국이 공산당 독재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물과 기름을 부조리할지라도 공존하도록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부조리는 더이상 “봉합”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오르고 있다. 코로나 이후 중국의 경제 침체와 여러 사회 문제들이 중국인들이 “다시금” 투쟁의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다.


그렇다. 다시금. 중국 본토 민주화의 역사는 톈안먼 이후로 끝났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를 알아보기에 앞서 문화 혁명이 막을 내리던 당시 1976년 중국의 현실로 들어가봐야 한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1979년부터 덩샤오핑은 실사구시(현실에서 진리를 찾는다.)라는 표어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는 17세기 경세치용 학파의 구호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어를 필두로 한 정치 세력은 각각 개혁파와 보수파로 나뉘게 되었다. 개혁파는 경제적 자유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보수파는 개혁개방 속도에 제동을 걸면서 사회주의 기본 원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지식인과 정치계는 마오쩌둥의 세뇌에 빠져 생각이 갇혀 있는 인민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한 1978년 광명일보에 실천이 “진리 검증의 유일한 검증이다.”라는 제목의 중국의 진리 표준 대토론을 유발한 7000자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먼저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 자기 사유의 진리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하였고 직후 마오쩌둥의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누가 진리를 발견하느냐는 결국 주관적 과정이 아닌 객관적 실천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는데, 이는 실천이 진리의 유일한 검증 기준이라면 교조주의적인 독단이 설 자리는 없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식인이 후야오방이다. 정치인이기도 했던 후야오방은 정치적 민주화와 사상적 자유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마오쩌둥의 오류들은 초기에 제거될 수 있었다. 이후 1980년대는 사상의 해빙기였다.


후야오방은 이 시기에 자유와 권리, 권력분립,민주의 가치 등을 중요하게 여겼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단 스스로 자생적인 민주주의를 깨닫고자 했다. 리흥린이라는 지식인은 문혁은 인간의 개성을 파괴하여 독창성과 창의력을 파괴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했다고 주장하며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신계몽주의 시대의 기수로 떠올랐다. 그는 5-4운동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개인의 각성”을 이루고자 하였다.


언급한대로 1980년대 세계는 자유와 민주의 열풍에 휩싸였다. 10년만에 철의 장막은 걷어지고 공산당 정권은 무너졌다. 1989년 톈안면 과정에도 독재 타도의 외침이 있었지만 결국 비참한 무력진압이 반복되었다. 자유주의가 전제된 민주가 아닌 봉건 시대에 있을 법한 위민통치 같은 것을 민주라고 받아들이는 현재의 중국인들은 이때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톈안먼 대학살의 실질적 희생자는 최소 1만명이라고 한다. 중공중앙은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물러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용서받을 수 없는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현장에 있던 우런화라는 지식은 “잊지 않으리”라는 인상적인 격언을 남긴다.


그의 다짐이 시대를 넘어 전해진 걸까,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인민들의 민심은 점차 하락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방역에 실패하고 이에 더해 당시 봉성 작전까지 펼쳐 인권을 억압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진핑 3기에는 시진핑이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복고적 제국주의를 만들어내던 참이었다.


2022년 펑리파라는 사람이 시진핑 독재를 타도하자는 현수막을 걸고 불태우는 시위를 하자 2022년 11월 25일 부터 나흘동안 중국 주요 도시에서 최소 23건의 시위가 발생한다.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중국의 인민들이 “인민에 복무하라’는 구호와 더불어 거세게 저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더해 우루무치에서 발생한 연이은 “의문의” 화재 사고는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백지로 시위를 벌이는 일종의 혁명을 일으킬 정도의 이변을 일으킨다.


최근에는 학교폭력 등 중국내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폭로되면서 사람들의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갈망은 점점 자라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반중 정서로 신냉전을 악화하는 게 아니라, 투키디데스의 문을 연 시진핑으로 중국을 싸잡아 불 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갇힌 중국인들의 처절한 분노를 응원하고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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