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저널리즘

능력주의의 숨은 상처

<계급의 숨은 상처>(리처드 세넷,조너선 코브)를 중심으로

by 최시헌

최근 20대 남성에 대해서 가장 많이 나오는 논의는 극우화이다. 물론 나는 극우가 아니지만, 그걸 변명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20대 청년들이 능력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던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오 표현을 쓴다던지와 같은 표면적인 현상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그럼으로 인해서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지와 같은 논의를 하려고 한다.

사실 20대 남성들이 진짜 극우화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매체마다 각기 불확실한 주장을 하고 있는만큼 나는 20대 남성들에 대해서 섣불이 단정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MZ세대가 능력주의 말고는 특별한 대안이 자신들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먼치킨 웹툰과 같은 컨텐츠가 전형적인 표상이다. 먼치킨은 말 그대로 절대적 강자가 된 주인공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서사를 지닌다. 일단 상대적 약자였던 주인공이 힘을 얻고 나면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이 거의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얻어도 세속적인 관념을 전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힘의 논리를 추구하며 패도적인 길을 걷고 재력과 명예가 모든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인의 유교적 윤리인 가족애를 이야기한다. 그렇다해도 세속적인 관념이 없다면 가족애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향이든 남성향이든 귀결되는 현상을 보면 그러하다.

그리고 대부분은 능력을 얻기 전까지 불행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능력의 성취는 분명 청춘들의 마음에 힐링을 준다고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인공이 세계관 절대자가 되어도 심지어 세계의 구원자가 되어도,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래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풀리지 않는 딜레마는 이러하다. 능력의 비범함과 소시민적 평범함이 동시에 주인공에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삶을 살았던 과거의 주인공의 세속관념과 능력자가 된 주인공의 세계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억지로 맞물린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허구로서도 불가능한 이상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20대 청년들은 능력주의의 오랜 틀을 오히려 개혁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남들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뛰어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비범한 소시민의 내면화는 이를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어째서 생기는 것인가.

리처드 세넷과 조너선 코브의 <계급의 숨은 상처>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으로 자기의 자아를 입증하여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작 그 과정에서 그는 타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인정을 받는 그것이 목적이 되고 타인이든 자신이든 사람으로서는 모두 수단이 되는 것이다.

가족간 갈등, 자아의 과도 팽창, 타인에 대한 공적인 비난 등의 추한 면면들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수 속 소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소수는 감정적으로 다수와 단절되고 다수는 패배감을 느끼며 둘 다 고립되고 만다. 그런데 또 공교롭게도 한국인의 편협한 세속관념에 의해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평균적인 겸손함과 일류의 능력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그러나 20대 청년들이 처한 경쟁 상황을 보면 이는 우주 속 제 2의 지구 찾기에 가깝다. 학력 인플레와 늘어가는 스펙과 늘어가는 자기계발서, 그리고 길어지는 취업 빙하기는 사회적 성공을 천문학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사실 성공한 직책이 아닌 평균적인 일자리의 기준조차 높아져버린 상태이다. 이제 청년들은 비정규직에 언제고 대체될 수 있는 일용품이 되었다. (이에 더해 인공지능의 침략은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리처드 세넷과 조너선 코브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시조격인 계몽주의자들이 신의 심판을 추방하고 인간의 상호존중과 모든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연결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능력 있는 자에게는 외로움과 고독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패배감과 자책만이 남을 뿐이기 떄문이다. 윤리가 효용성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결과인 것이다.

이 모든 논의 끝에 떠오르는 것은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이다. 여기서 칸트의 유명한 선의지 개념이 나온다. 선의지는 의욕함으로써 그 자체로서 선함을 의미한다. 보존과 번영이라는 자연의 목적이 아닌 이성의 실천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선의지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선의지를 ‘이성’의 실천적 자유의 추구라고 정의내린 칸트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성은 결국 자연의 자기 보존이라는 합리성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선의지는 이성과 같은 논리체계를 벗어난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본다. 흔히 말해지는 ‘빵 없이도 사는 삶'은 부르주아 지식인보다는 영적인 수도자에게 보다 잘 어울린다. 기독교에서 성령은 마땅히 그 자체로 선하다. 선의지에서 선함이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라면 타인을 조건없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윤리가 이성적 사변보다 올바를 것이다.

사랑은 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섬기는 것이다. 사랑은 차가운 실험실이 아니라 죄와 용서와 갈등과 화해 속에 이루어진다. 영혼은 그 가운데 자신의 삶 자체를 구원이라는 목적으로 만든다. 사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영적인 세계에서는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삼위일체론이나 교회론을 보더라로 구원의 수단으로서 대해지는 인격은 없다. 모두가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신이 인간을 수단화한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신이 인간을 위해서 제물이 된 적은 있지만.

반대로 세속종교는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없는 수단 그 자체이다. 이 기계는 작동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작동하지 않는다. 자기 보존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귀결을 생산할 뿐이다. 가령 기후과학자가 지구의 위기에 대해 논할 떄, 그에게 인류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는 대답할 수 없다. 혹은 기후위기가 인간 탓임을 반대하는 기업가에게 인류가 끝없이 성장하고 진보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근본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설계된 틀 안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오벨리스크는 신없는 우상, 숭배되지 않는 황금송아지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아직 심판의 날은 오지 않았고 오늘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며 신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MZ세대의 숨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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