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집

고도를 기다리며 서평

by 최시헌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느 두 나그네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일상을 그린 희곡이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지만, 고도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드러나는 나그네들의 뒤죽박죽 섞인 기억과 그들의 뜻을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이 작품의 내용을 실험적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에도 기독교적 배경이 등장함으로써 고도에 대한 힌트가 언급된다. 예를 들면, 제 1막에서 블라디미르가 요한복음서에서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세 강도를 언급한다. 블라디미르가 반복해서 의문을 품은 점은 왜 공관복음서라고 불리는 4대 복음, 마태오,마르코, 루카, 요한 중에서 요한만 그 세 강도 중 예수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은 한 강도만 구원을 받았다고 썼느냐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심부름을 하러 온 소년은 자신은 염소를 지키지만 형은 양떼를 지키고, 고도가 채찍으로 형을 때린다고 하며, 제 2막에서도 형이 아파한다고 말한 점에서 형을 예수와 같이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양떼를 지키는 목자의 이미지는 주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표현하는 상징이며 또한 예수가 수난을 당할 때 채찍질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장면의 공동점은 이야기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령, 제 1막에서 블라디미르가 지적한 부분에서는 요한만이 언급한 구원된 강도는 어째서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내용과 양떼를 지키는 것이 형이라면 동생인 소년은 누구이며 그가 지키는 염소는 무엇인지, 그리고 왜 고도나 형이 아닌 소년이 오는지가 드러나지 있지 않다. (염소는 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한 면에서 소년을 적그리스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야기의 사각지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의 사각지대 혹은 망각이기도 하다. 구원된 강도의 기록도, 소년의 존재도, 결과적으로 우리가 현실에서 놓치고 있는 어떤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의 기억이 제 1막에서 2막으로 가는 하룻밤이 지나는 사이에 전혀 엇갈리게 되는 장면도 우리가 현실에서 인식하는 우리의 운명이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인지를 생각하게 하며 변증법적 세계관, 혹은 종말론적 세계관이 지니는 결정론이 실제로 들어맞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을 품게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층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포조와 럭키이다. 포조라는 사내는 럭키를 데리고 다니는데, 포조는 럭키를 짐꾼 취급하는가 하면 자신의 애완동물인양 매우 소중한 반려자와도 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럭키(luck)을 일종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운명을 때때로 매우 소중히 여기다가도 부담스럽게 느낄 떄도 있다는 의미이다.

고도라는 절대자에게로 가는 길이 이 전체 희곡의 구조라고 본다면 처음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로 착각한 이 사람은 사실 인류 원형의 의인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포조는 어떨 때는 운명의 힘에 의지하고 어떨 때는 저항하는데 사람들도 운명을 믿는 이들이 있고 아닌 이들도 있는 법이다. 그러한 특수한 사람들이 종종 고도와 같이 영웅적인 인물로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이러한 관점들을 바탕으로 상징들을 엮어보면 작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메시아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나타나는 것들은 우리의 부정확한 인식에 의해 구원자처럼 여겨질 뿐, 사실 적그리스도이거나 영웅이며 이들은 모두 실제 메시아가 아님을 말하고 있으며 인간은 나중에 두 나그네가 목을 매서 죽기를 원하게 되는 것처럼 진정한 신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에 지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도에 대한 분석은 이전부터도 다양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도가 무엇이든 간에, 신이건, 자유건, 빵이건 간에 확실한 것은 우리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정의와 진리의 실현에 굶주려 있으며 그 기다림에 상당히 지쳐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고도가 신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그가 보내는 메시아를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면, 그러나 우리가 마주치는 이들이 아직도 포조나 심부름꾼 소년이라면, 우리는 언제까지 진실을 위해 저항해야 할 것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