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평집

<압축소멸사회>(이관후) 서평

by 최시헌

무려 200만 조회수를 넘긴 MBC 100 분 토론 유튜브 채널 2023.03.26일자 영상에서는 한국의 저출산 정책에 대해 4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논의한다. 그 영상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파트를 보면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주진형 씨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애들을 안 낳아줘야, 한 5~10년 정도 안 낳아줘야 저희 세대들이 정신을 차릴 겁니다.”

저출산 정책에 대한 세대간의 동상이몽을 지적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 담론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난점이 있다. 하나는 청년들의 인생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저출산 문제의 해결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도권은 기성세대들에게 있다는 관점,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낳지 않는, 비생산적인 방법의 반항이 사회에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저출산 정책과 청년 세대에게는 이런 자조적인 농담밖에는 대안이 없는가?

사회학자 이관후의 <압축 소멸 사회>는 대한민국 사회의 “소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소멸이란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완전한 무존재로 돌아가는 절대적 의미의 소멸을 말한다. 저자 이관후는 대한민국이 이토록 절박한 위기에 놓여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저출산,고령화,인구절벽,지방소멸 등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중요한 과제였지만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문제이다. 세계적으로는 국제질서와 기술의 변화, 국내적으로는 인구구조의 변화와 국토불균형의 심화와 같은 일들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 변화가 빨라져서 사회가 어려울 때에 파멸을 막기 위한 장치가 바로 정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는 이미 무능해진 지 오래이다. 그동안 한국이 빠른 속도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연구했기 때문이지만,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든 이후부터는 해답을 찾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소멸은 성공에서 온 것이 아닌 실패에서 왔기 때문에 압축 성장에서 압축 소멸이라는 반대방향의 사회 변화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같이 인구가 줄어드는 과정에 있는 수축사회였으나 이제는 소멸국가의 범주로 들어서고 있다. 2012년 합계출산율 1.3%가 2018년에는 1.0%를 돌파하고 2022년에는 고작 4년 차이로 0.78로 급락했다. 이제 골든 타임은 5년이라지만 청년들의 불확실한 미래와 여성에게 전가되는 독박육아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마저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제야 막 K-컬쳐의 세계적 인기와 유래없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한국은 문명의 정점에 오른 후 자살할 것인가?

저자가 한국이 ‘자살’한다는 비유를 쓴 이유는 국가의 소멸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소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왜, 언제, 인간은 죽음을 결심하는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을 결정이 대부분 청년세대에게 맡겨져 있고 그들이 아이들을 낳지 않기로 한다면, 그것이 국가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왜 청년 세대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월드 벨류 서베이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 청년 세대의 무려 20.8%가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KBS 세대 인식 집중조사에서도 청년들은 집값 상승으로 인해 자신들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답하였고, 암호 화페는 자신의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는다. 현재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인생의 의미와 사회적 가치의 쓸모를 못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저자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입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전국의 대다수 고등학교는 상위권 10%의 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나머지 90%는 교육에서 거의 배제된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괜찮은 일자리는 연간 7만여개(대기업/공공기업)뿐인데, 이는 다시 말해 90%의 청년들에게는 사회적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너무 극단적인 결정론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입시와 일자리라는 기성세대들의 성공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7~10%의 성장 시대와 달리 현 청년들이 살아가는 1~2%의 성장 시대에는 계층 이동이 너무 어렵다.

삶에 대한 평가 혹은 행복의 기준이 입시와 일자리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채워졌더라면 청년들의 희망의 크기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중요 요소인 사회에서 90%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면 어느 누구도 쉬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EBS 다큐 <교육격차>에 의하면 이 치열한 사회 경쟁 속에서 이긴 10%조차 이 경쟁이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공한 10%조차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교육과 일자리를 둘러싼 무한 경쟁은 저출산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지나치게 엘리트 지향적이고 표준 자체가 너무 높은 사회적 울타리에 더 이상 후세를 풀어놓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헝가리의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처럼 청년들은 태어났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범죄라고 보는 것일까?

자, 다시 주진형 씨가 말한 대안으로 돌아가보자. 일단 그의 세대가 장악하고 있는 정치는 전혀 자정작용이 되고 있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하고 심판하여 자신들의 자리만을 차지하려는 아비규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소멸”을 피할 방법, 존재론적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그렇다면 청년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갈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이 시대의 피해자인 그들에게 감히 회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렇게 사라지기에는 그들은 너무 찬란하다. 우리가 만일 저항을 한다면 그것은 임레 케르테스의 방식처럼 반존재적이어서는 안된다. 이미 <압축소멸사회>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지금의 문제는 한국인의 부정적인 사회적 가치관에 있다. 입시와 일자리, 그것도 매우 보수적이고 제한적인 기준에다 엘리트주의적인. 이러한 관점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모두 현 세대의 것이 아니다. 청년 세대가 자라나면서 형성했어야 하는 자아,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정립하는 정신은 기성세대의 가스라이팅으로 말라비틀어진 것이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고 한다. 어떤 것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로만은 인간은 고립적인 존재일 뿐이다. 자발적인 활동은 자아의 온전함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한다. 노동은 그러한 자아실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관객을 위해 연출되면서 억압되었다. 그렇다면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는 연기하기를 그만두면 된다.

만일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후세에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진심이라면 사회적 가치관을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 바꿔나가면 된다. 혼자서라면 터무니없이 어려운 일이겠지만 티끌이 모아 태산이 되듯이 청년 세대 모두가 자유로이 인생을 개척해나간다면, 세상의 어려움에, 편견에,권위에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저마다의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대한민국은 그 본질부터 달라질 것이다. 파도 앞에 모래알처럼 무너질 것 같아도 서로에게 견고하게 달라붙어 함께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롤)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