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소네트 19번 비평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by 최시헌

19.

탐식하는 세월이여, 사자의 발톱을 무디게 해도 좋다

대지로 하여 그의 아름다운 새끼들을 탐식케 해도 좋다

맹호의 턱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도 좋다

장생할 불사조를 불살라 죽여도 좋다

네가 질주함에 따라 계절을 즐겁게 슬프게 해도 좋다

발걸음 빠른 세월이여, 네 마음대로 행동하라.

넓은 세계와 쉬스러질 모든 미에 대해서는.

그러나 내 다만 하나의 큰 죄를 금하노니

오! 내 벗의 아름다운 이마엔 너의 시각(侍刻) 새기지 말라

그대의 태고의 붓으로 그 얼굴에 주름을 긋지 말라

후세 사람들에게 미의 표본이 되도록.

그를 너의 행로에서 더럽히지 말라.

늙은 ‘세월’이여, 네 비록 이 죄를 함부로 저지를지라도

나의 벗은 내 시 속에서 영원히 살리라

Devouring time, blunt thou lion’s paws

And make the earth devour

Her own sweet blood,

Pluck the keen teeth from

The fierce tiger’s jaws

And burn the long-liv’d

Phoenix in her blood,

Make glad and sorry Seasons as thou fleet’st

And do whate’er thou

Wilt, swift-footed time,

To the all the wide world and her

Fading sweets

But I forbid thee one most heinous

Crime,

O carve not with hours

My best fair brow

Nor draw no lines there

With thine antique pen

Him in thy course untainted do allow.

Yet do thy worst old time

Despite thy wrong,

My love shall in my verse ever live long


나는 지난번에 셰익스피어의 가장 대표적인 소네트인 18번: Shall I compare to thee? 를 논평해본 적이 있다. 18번의 주된 주제는 사랑과 청춘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끝마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꿰뚫는 가장 심오한 주제 중에 하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번 작품은 18번에서 바로 이어지는 19번 작품을 다루려고 한다.


19번 작품을 보면, 마치 시간에게 명령을 하듯이 허용과 금지의 영역을 정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시간 앞에 화자의 무력함도 동시에 느껴진다. 탐식하는 세월, 맹수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고 계절을 바꾸는 ‘세월’이라는 전능한 존재를 한낱 인간인 화자가 어떻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화자는 넓은 세게와 쉬이 스러질 모든 미를 겸허히 세월에게 내놓는다. 그러면서 다만 자신의 벗에게만큼은 그 마수를 뻗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앞서 드러난 무력함을 돌아보면 이는 거의 애원 혹은 염원에 가깝다. 자신의 벗이 걸어간 그 길에는 어떠한 흠도 남지 않기를, 후세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라는 어찌보면 소박한 마음인 것이다. 온세상의 온갖 아름다움 대신 제 옆의 친구의 아름다움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친구를 앗아가겠다고 한다면? 극도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화자는 최후까지도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벗의 아름다움을 새김으로서 세월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나선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Sein and Zeit)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내렸다. 근원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존재성은 죽음으로 미리 달려 갈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실존적이게 되는 현존재만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이 된다. 그런데 현존재가 진정으로 실존적인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그 가능성 그 근원적인 공포를 피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존적 결단을 내린 자는 자기 존재의 권리성을 구태여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 결단이 자기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모든 것은 죽음에로, 즉 완결성으로 수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미완결성은 현존재의 선결조건이다. 아직까지도 끝까지 달려가 마저 가닿지 않은 실존적 고뇌가 남아있을 때, 현존재는 비로소 자기 존재의 전체성과 마주한다


소네트의 화자도 이와 같은 결단의 구조를 보여준다. 분명 세월은 맹수의 목숨도 앗아가고 계절도 변화시키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종국에는 먼지로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회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19번 소네트와 하이데거와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타인의 죽음에 대한 관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것이어서 타인의 실존을 자신이 덜어준다거나 그 역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19번 소네트의 화자는 기꺼이 친구의 영생을 빌어주면 그를 자신의 작품에 남김으로써까지 지키려고 한다. 분명 셰익스피어의 시는 완결되어 있지만 그의 친구의 존재 없이는 언제나 미완성된 상태의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타인을 자신의 실존, 즉 작품에 남김으로써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어 실존이라는 지평을 초월한 현존재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틀만으로는 이 지점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죽음이 오직 자기 자신만의 것이라면, 타인을 작품에 새겨 영생시키려는 화자의 행위는 실존의 바깥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균열을 메우기 위해 루카치의 유적 성질 개념이 필요해진다.


타자와 자신을 하나로 묶음-즉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과정을 게오르그 루카치는 사회적 존재론을 위한 프롤로고메나에서 유적 성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언어로서의 유적성질이 고도로 진화하여 철학과 예술의 형식으로 변모했을 때 완전히 발전된 인격으로서의 인간이 진정한 역사의 활동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19번 소네트는 소박한 명령문이자 위대한 기도문으로서 이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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