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뉴욕의 주형법원장에 임명된 화자는 월스트리트에 산다. 화자는 업무가 증가하자 이미 있던 사환들에 더해 바틀비라는 새로운 직원을 고용한다. 그는 주야장천 업무에만 집중했고 엄창난 양의 필사를 해냈다. 말없고 창백하며 기계적인 모습의 바틀비에게도 한 가지 심각한 단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호검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자와 사환들은 상사의 말을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계속 거절하는 그에 대해서 매우 화가 났지만, 동시에 당황하여 이렇다할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차였다.
그러나 바틀비의 꾸준함, 최고의 작업효율성, 간단없는 근면성, 정숙성, 한결같음이며 바틀비가 거부하는 일들은 모두 감정적이고 불필요한 일이기는 했기에 당분간은 화자는 바틀비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바틀비가 회사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며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 화자는 그의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외로울 것이 불쌍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틀비의 행동에서 광기를 느끼고는 그를 혐오하게 된다.
비록 바틀비는 자신만의 극히 좁은 사무실 구석을 침범당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지만 화자는 그를 그곳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갖가지 행동을 해본다. 심지어는 바틀비를 해고하기까지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바틀비는 여전히 일을 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의지>와 <필연>애 관한 설교집을 읽으며 마음을 추스리던 화자는 외부인들에게까지 바틀비가 불편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예 새 사무실로 옮기고 바틀비를 버린다.
새 사무실에 화자가 자리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자 새로 건물에 들어온 직원들이 그를 맨해튼 교도소에 수감시킨다. 수감된 바틀비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식사까지 굶다가 결국 죽고 만다. 바틀비가 신경쓰여서 그 곳에 가본 화자는 욥기의 한 구절을 읊으며 그의 눈을 감겨준다.
“페허에 잠든 모든 왕들과 고관대작들과 함꼐”
후일담에서 화자는 바틀비가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말단직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며 죽음을 맞이한 편지들을 기계적으로 태워야 했던 바틀비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지에 대해 말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필경사 바틀비는 막스 베버의 관료제의 특성을 상당히 닮아있다. 바틀비가 감정이 거의 없고 기계적으로 엄청난 양과 질의 작업을 해낸 것처럼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직업으로서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일수록 효율이 늘어난다.
관료제화의 전제와 수반 현상에서 베버가 제시한 내용에 따르면 행정 업무가 질적으로 늘어날수록 계산가능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여기서 비합리적 김장요소를 배제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대 사회의 조직 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인 월가를 배경으로 한 점도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한편 배달 불능 우편물들, 죽은 편지들의 무덤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편지들은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과정에 의해 타버렸지만 그 안에 구구절절 들어있는 사연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말하듯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러한 감정들,욕망들이 철저히 죽어 있는 효율성에 미친 사회가 현대 사회라는 것을 허번 멜빌은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사회의 모습은 서구 근현대 문학사가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 따르면 서구 문학은 형이상학적 욕망의 폭로로서, 욕망에 수반되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도정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욕망을 강조하다가 나중에는 욕망을 제한했다가 자만함에 빠져 신이 되고자 하다가 외려 그에 무력함을 느껴 광기에 빠져버리는 비극을 겪는 것이 형이상학적 욕망의 진실이었다. 즉 실존적 죽음만이 근대 문학이 수렴해버리는 결과였다. 이는 근대의 실패를 구조적으로 따르는 결과였다.
브뤼노 라투르는 코페르니쿠스적 반혁명이라고 부르는 그의 이론에서 근대적 설명 방식은 사회와 자연의 두 극단들이 중간 매개에서 분화하기도 하는 동시에 이후 합류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관념의 점진적인 재혼합이라는 마지막 단계에서 근대는 이 두 극단을 결과적으로 하나로 합치지 못했고 이것이 라투르가 말하는 근대의 실패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의 실패, 사회와 자연이 현실적으로 부딪힌 장은 바로 ‘자본’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 능력이 고장이 남에 따라 생산능력이 소비능력보다 더 많이 커지는데 정작 이를 소비할 사람들, 노동자, 즉 대중들은 그만큼의 착취를 당하지 소비할 야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노쇠한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은 자체적인 생산 역량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생기는 모순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품게 된다. 자신을 죽이는 무기로 수명을 사가는 시스템이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근대화가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처럼 우리는 필연의 목적론 속에 살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뒤에는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지난 20세기 동안의 지나친 낙관론이었다.
결과적으로 21세기 들어서 크고 작은 분쟁이 터지다가 러-우 전쟁으로 번지고 현재는 트럼프가 두 번째로 당선된 이후 중동 전쟁이 폭주를 하고 있다. 서구 근대 문학이 빠져버린 스틱스 강에 다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말을 고쳐쓸 수는 없는 것일까?
루카치의 <프롤레고메나>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필연성의 극복은 신(의지)가 아닌 자연(필연)의 규칙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근대화의 합리성 안에서밖에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가? 이미 실패한 기획서 속 언어들 사이를 헤매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다시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담론으로 돌아간다. 그렇다 분명히 문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욕망의 진실은 죽음이다. 인간은 신이 아닌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하여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러나 죽음이 소설 작품의 진실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서 스테판 트로피모비치가 루카복음서의 게라사의 마귀들 이야기를 듣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평안했던 것은 이 떄문이다. 그의 죽음은 정신의 죽음이 아닌 정신인 죽음이다.
이와 비슷하게 상기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 중 한 명을 돌로 쳐서 죽인 바울이 회심하여 기독교 신학의 근간을 세운 성인이 된 일화일 것이다. 바울이 사막을 건너다가 눈이 멀어버린 바울에게 예수의 목소리가 왜 나를 박해하였느냐? 라고 물은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신념, 형이상학적 욕망에 빠져 자만했다가 진정으로 선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우리가 필경사 바틀비를 이해하려다 놓친 고리는 바로 이렇듯 욕망이 현대인을 파괴한 과정 혹은 근대의 실패이다. 우리가 회복하기 위해서 필연 전쟁이 나고 종말에 가까운 상황이 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언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현대문학이 죽었다고 생각해서 자꾸만 자기 안으로 미끄러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이 현대 사회의 합리화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세속적 욕망의 매듭을 붇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