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맥루한, 그람시를 통해 본 한국 웹소설의 가능성과 한계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이 수행하던 기능 — 국민 형성, 내면 발견, 비판적 공론장 — 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구조적 조건인 국민국가·자본·네이션의 삼위일체와 함께 소멸했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문학이 약해졌다는 진단이 아니라, 문학이 기대고 있던 접합 구조 자체가 해체됐다는 구조적 분석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오늘날 문학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장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로 전락했다.
문학은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다만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형식과 매체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마샬 맥루한의 통찰이 유효하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명제는,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인쇄 매체의 선형성을 통해 근대적 개인과 민족어와 내면을 구성했듯이, 플랫폼 연재라는 새로운 매체가 새로운 종류의 서사 주체와 서사 구조를 필연적으로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접합 구조는 끝났을지언정, 이데올로기적 이행은 형식의 변화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웹소설은 그 이행의 현재적 형태다.
한국 근대문학의 역사를 통으로 보면, 정체성 문학은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었다. 이광수의 『무정』으로 상징되는 식민지기 문학은 '조선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민족 정체성의 질문 위에서 성립했다. 근대 소설의 형식을 일본을 통해 수입하는 동시에, 그 형식 안에 민족적 내면을 담아야 했던 것이다. 가라타니가 일본 메이지 문학에서 발견한 '내면의 발명'이 한국에서는 식민지 조건에 의해 굴절된 채로 수입됐다. 개인의 내면을 발견하는 순간, 그 내면은 이미 민족의 내면이어야 했다.
해방 이후에도 분단, 전쟁, 이념 대립이라는 역사적 조건이 문학에 집단 정체성의 무게를 계속 부과했다. 1970~80년대 민중문학과 노동문학은 정체성의 축이 민족에서 계급으로 이동했을 뿐, 문학이 집단 정체성을 담는 그릇이라는 구조는 유지됐다. 그리고 이 시기야말로 가라타니적 의미에서 근대문학의 공론장 기능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 시기였다.
결정적 전환은 1990년대에 일어났다. 민주화 이후 운동의 언어가 소진되자, 집단 정체성을 담던 문학의 언어가 갑자기 근거를 잃었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이 개인의 내면, 일상, 감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가라타니가 메이지 일본에서 발견한 '내면의 발명'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움직임을, 한국이 90년대에 뒤늦게 경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IMF의 구조적 불평등이 가시화되면서, 개인의 내면은 다시 젠더·계급·세대의 정체성으로 재포획됐다. 민족에서 계급으로, 계급에서 젠더로 — 한국문학은 그 내용을 바꾸면서도 정체성이라는 중력에서 단 한 번도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다.
이 구조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20세기 초 이탈리아 문학에서 목격한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람시는 당대 이탈리아의 지식인 문학이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크로체가 대표하는 아카데믹 관점 — 문화사는 예술 외부에 있으며, 문화사는 예술사에서 배제된다 — 이 그 유리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예술은 예술 자체의 내재적 기준으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이 입장은, 대중의 요구와 욕망으로부터 문학을 절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람시가 관찰한 대중은 달랐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계층적 콤플렉스와 일상의 불안정성을 돌파하는 초인적 인물이었다. 문학적 세련이나 미학적 독창성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을 대리 수행하는 서사적 힘이었다. 기성 문학이 그 요구를 포기하고 나약함의 미학으로 후퇴했을 때, 대중은 외국의 대중소설 — 탐정, 모험, 활극 — 로 이동했다.
오늘날 한국의 구도는 이것과 정확히 겹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으로 대표되는 현재 한국 주류문학은 형이상학적 계급성을 지닌 여성 지식인의 내면을 탐구한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정교하지만, 그 공명은 특정한 정체성 정치에 동의하는 독자층에 한정된다. 현실의 평범한 여성이 판타지 세계로 가서 자신의 욕망을 은유적으로 실행하는 웹소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전자는 지식인의 형이상학을, 후자는 계층적 욕망의 서사적 수행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람시의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오히려 더 넓은 계층의 실제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동시에 현재 한국 문학 비평이 웹소설을 '해석해야 할 문학'이 아닌 '분석 가능한 콘텐츠'로 분류하는 태도 자체가 크로체적이다. 산업 구조와 소비 패턴은 논의되지만, 서사가 어떤 조건 속에서 선택되고 변형되었는지는 질문되지 않는다. 이 배제의 논리가 곧 대중과의 유리를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웹소설은 어떻게 그 요구에 응답하는가. 핵심은 '변장'이라는 개념에 있다. 웹소설의 이데올로기는 상업성에 포획된 것이 아니라, 상업성의 형식 안에 녹아들어 유통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가 자본에 흡수되어 무력화된다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테제와는 방향이 다르다. 제임슨이 말한 포획은 비판적 이데올로기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무해화되는 것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장은 이데올로기가 자본의 유통 형식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더 넓은 대중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프랑코 모레티가 『멀리서 읽기』에서 제안한 관점이 이 맥락에서 유효하다. 그는 문학을 선택과 탈락이 반복되는 생태계로 읽는다. 웹소설 플랫폼에서 조회수·완독률·매출이라는 수치화된 지표가 서사를 즉각적으로 평가하는 환경은, 냉혹하지만 동시에 정직하다. 대중의 요구에 공명하지 못하는 서사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 선택 압력 속에서 반복적으로 살아남은 구조가 회귀·빙의·환생, 즉 회빙환 서사다. 이것은 유행이나 클리셰가 아니라, 특정한 시대적·기술적 조건 속에서 가장 잘 적응한 서사 형식이다.
이 변장이 가능한 데는 오늘날 대중의 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람시 시대의 대중은 문맹에 가까운 하층민으로, 초인 서사는 그들의 계층적 열등감을 보상하는 기제였다. 그러나 현재 웹소설의 독자는 고학력이고 미디어 리터러시가 높으며 서사 문법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들에게 회빙환 서사의 초인은 단순한 대리 보상이 아니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감지하고, 그 구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지적 수행이다. 대중은 더 이상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며, 따라서 변장한 이데올로기도 더 복잡한 층위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있다. 웹소설을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게 만든 바로 그 조건 — 생존주의 — 이 동시에 웹소설의 한계를 구성한다. 회빙환 서사의 출발점은 항상 생존이다. 주인공은 죽었거나, 버려졌거나, 이미 실패한 미래를 알고 있다. 이 서사적 조건은 노력과 보상이 연결되지 않고 개인이 언제든 탈락할 수 있는 현실과 정확히 포개지며 강력한 공명을 만든다.
하지만 생존은 역사가 아니다. 지금 웹소설의 유토피아는 대부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면 정의가 실현된다'는 구조 위에 있다. 주인공은 시스템 바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자가 된다. 이것은 현존 논리의 내면화이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논리가 철저히 지켜질 때 나타나는 내재적 유토피아다. 더 나아가 일부 서사에서는 생존조차 부담스러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방향으로 퇴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람시가 말한 초인적 요구가 소진된 자리에 남는 피로의 서사다.
루카치가 『역사소설론』에서 제시한 기준이 여기서 유효해진다. 루카치에게 역사소설의 조건은 '역사적 힘들의 충돌이 개인의 운명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개인이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가 개인의 운명을 통해 드러나는 것. 살아남는 것을 넘어 살아내는 것, 즉 세계를 통과하면서 그 세계가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묻는 서사. 이것이 생존주의를 넘어선 역사주의의 차원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서사의 맹아는 이미 일부 텍스트에 존재한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이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텍스트다. 주인공 김독자는 영웅이 아니라 독자다. 세계를 구하는 논리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서사 구조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서사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메타적 당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역사주의적 감각이 있다. 물론 결말이 다시 개인 영웅주의로 수렴하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지만, 그 서사적 운동이 보여주는 방향성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이 논의가 요구하는 수준의 역사주의 웹소설은 아직 충분히 쓰이지 않았다. 이것은 논증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강점이다. 형식적 조건은 이미 갖추어졌고, 독자의 지적 준비도 이루어졌으며, 이데올로기가 상업적 형식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남은 것은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작가가 웹소설 안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 작가는 대중의 언어로 말하되 대중의 욕망을 역사적 인식으로 확장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격변의 시대에 — AI의 등장, 계층 이동의 봉쇄, 기후 위기, 세계 질서의 재편 — 모두가 헌터가 되는 판타지처럼 모두가 역사의 행위자가 될 필요에 직면한 시대에, 웹소설이 생존을 넘어 '이 세계를 구하는 당위가 무엇인가'를 개인적 동기가 아닌 세계관의 층위에서 묻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근대문학이 수행했던 도덕적·정치적·철학적 기능을 새로운 매체와 형식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변장했을 뿐이고, 그 변장이 마침내 벗겨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지만, 종언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이 기대고 있던 특정한 구조였다. 맥루한이 가르쳐주듯, 매체가 바뀌면 메시지도 바뀐다. 그람시가 보여주듯, 대중은 항상 지식인 문학이 포기한 자리에서 자신의 초인을 찾아왔다. 한국문학이 정체성의 중력에 다시 포획되어 계층의 요구를 떠안지 못하는 지금, 그 요구는 웹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 안에서 상업성의 외피를 입고 유통되고 있다.
문제는 그 유통이 아직 생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 살아내는 것, 개인의 욕망을 넘어 세계의 구조를 묻는 것, 내재적 유토피아를 넘어 역사적 당위를 제시하는 것 — 이것이 웹소설이 단순한 상업적 콘텐츠가 아닌 동시대 서사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이다. 그 문턱 너머에, 문학의 귀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