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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기 Aug 16. 2024

나는 온기가 필요한 인간이다

첫 공황 증상이 찾아왔을 때

내 삶에서 온기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심정적으로 황폐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나는 애정을 갈구하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곁에 둘 온기가 없으면 정신이 반미치광이가 되어 눈물을 뚝뚝 흘리거나 불안하여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는 인간. 애정결핍인 사람이 한심하다는 인터넷 글을 볼 때마다 ‘나도 이런 사람인가’라며 자기반성을 하고, 혼자서는 제대로 우뚝 설 수 없던 나를 끔찍이 싫어하여 바꾸고자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내가 나라는 인간을 받아들이게 된 건 스물 여덟 살이던 해였다.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고, 그저 인정하는 것 외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였지만.


스물 여덟 살이던 해 10월 즈음, 나는 스스로 가치 없는 인간이고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파국적인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눈물이 났고 잠이 오지 않았다. 10월 어느 날, 어김없이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로 잠을 설치던 새벽, 그게 찾아왔다.


처음 시작은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둑, 둑, 뛰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생각에 점점 몰두하며 정신이 거의 미칠 듯이 되자, 심장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주 외로 튀는 느낌이 들었다. 호흡이 지나치게 가빠지고 어지러웠다. 나는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어져 벌떡 일어났다. 정말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번뜩 스치고, 사라졌다.


첫 공황 증상은 그랬다.


그래서인지 온기라는 단어는 늘 내 마음을 건드린다. 한때는 사람 없이 홀로 설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어 이를 악물고 온기를 찾지 않아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텨본 결과 얻은 것은 ‘아,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온기가 필요한 인간이구나.’라는 자각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니까, 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생각했다. 사회적인 무리를 만들고 뭉쳐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족의 생존 방식이었으니까. 무리에서 떨어진 외톨이가 되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니. 오히려 내 몸이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닐까. ‘너 혼자 있다가는 죽어. 빨리 어디든 가서 붙을 무리를 찾아보란 말이야. 얼른!’


안 그래도 불안이 높은 내가, 초조해져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문득 웃음이 난다. 아, 온기를 찾고 갈구하는 게 그리 창피한 일만은 아니구나. 홀로 우뚝 서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데. 엄청나게 멋지지는 않아도 나름 나만의 인생인 건데.


극도로 외로운 사람은 우울해지기 쉬워지는 것 같다. 심리학에서는 우울을 검은 개에 비유하는데, 이 검은 개는 종종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우리를 뒤덮고 깔아뭉개곤 한다. 그럴 때 찾아오는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상담 선생님께서 이 얘기를 들려주셨을 때 나는 물었다. ‘그러면 검은 개를 어떻게 없애나요?’ 상담 선생님은 웃으며 유튜브에서 영상 하나를 찾아 틀어주셨다. ‘I had a black dog, his name was depression.’


우울이라는 검은 개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이 검은 개는 아무리 위협하며 쫓아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우리는 이 검은 개에게 목줄을 채울 수는 있다. 빨간색의, 아주 가느다란 목줄을 말이다. ‘이 가는 목줄로 이 큰 개를 어떻게 감당하나요?’ ‘일단 한번 채워보세요.’


그렇게 목줄을 채운 채 이놈을 데리고 어디든지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 검은 개는 아주 작아져 요크셔 정도의 크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검은 개를 데리고 어디든지 가며 살아가는 거라고.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난다.


외로움은 늘 찾아온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냥 감내하면서 사는 거다. 뭐 그리 발 동동 구르지 않아도, 외로움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데 어쩌겠나. 이 외로움이라는 애가 내가 좋아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겠다는데. 징글징글하고 떨쳐버리고 싶지만, 그냥 끌어안고 살아야지, 싶다.


언젠가 집단상담을 갔을 때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그런 피드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외로움이 당신을 참 좋아하나 봐요.’ 나는 그때 진저리치며 대답했다. ‘절 좀 안 좋아했으면 좋겠는데요.' 집단원들이 다들 웃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근데 그렇게 들으니까, 외로움이 참 귀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이 지겹고 귀여운 외로움이를 검은 개처럼 생각하고 곁에 두니, 마음에 온기가 느껴진다. 외로움을 떠올리며 온기를 느끼다니 참 아이러니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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