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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기 Aug 16. 2024

눈사람을 만든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몰라, 아빠.

눈 내리는 겨울에 떠오르는 기억

눈사람을 만든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몰라. 아빠도 기억 안 나지? 떠올리자면 엄청 옛날이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잖아, 그지.


나 엄마랑 언니랑은 눈 쌓인 날 밖에 나간 적이 있어. 와아아 눈이다, 하면서. 나 유치원생이고 언니 초등학생일 때. 아빤 모르지? 내 기억에 아빤 거기 없었던 거 같아.


아무튼 우리가 ***동 **아파트에 살 때 있지. 눈이 많이 와서 소복하게 쌓인 날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랑 언니랑 나갔거든. 엄마가 눈 쌓였다, 나가 볼까? 해가지구. 그땐 그게 얼마나 재밌는 놀이처럼 느껴졌는지 몰라. 진짜진짜? 이러면서. 나랑 언니는 어렸으니까. 그저 좋아서 와아아, 엄마엄마, 뭐 할 거야? 눈사람 만들 거야? 발자국 찍어 볼 거야? 재잘대면서 신나게 폴짝폴짝.


엄마는 밖에 나갔다가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막 나랑 언니를 꽁꽁 싸맸지. 스키장갑 끼우고 패딩 입히고. 완전무장이 돼서 내가 눈사람이 된 것처럼 뒤뚱뒤뚱. 장갑이 커서 손에 잘 안 맞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징징댔지. 이이잉, 이런 장갑끼고 어떻게 눈사람을 만들어어. 그랬더니 언니는 얘 또 징징거린다고 핀잔주고. 엄마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면 다 만들 수 있다고 등을 밀어댔지.


그렇게 밖에 나갔는데. 역시나 그 장갑을 끼고는 눈을 제대로 뭉칠 수도 없더라고. 고사리손으로 뭘 하겠어.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긴 했지. 큰 스키장갑 끼고 대충 조물거렸는데 엄청 조그맣게만 뭉쳐지고 잘 뭉쳐지지도 않고. 엄마는 맨손으로 (와, 심지어 엄마는 장갑 끼지도 않았었네) 웬만큼 둥그렇게 만들어서 우리를 줬는데. 그거 낑차낑차 굴려보려고 해도 뭐 어린애 둘이서 뭘 얼마나 단단하게 만들겠어. 다 부서지고 그랬지 뭐.


그래서 그냥 눈사람 만드는 건 포기했고 눈밭에 뛰면서 놀았지. 엄마가 원래 그런 거 좀 대충 하면서 잘 포기하는 성격이잖아. 나도 그렇고. 언니는 뭐 하다가 안 되면 금방 질려버리는 사람이고. 아무튼 그래서 눈사람은 걷어치우고 눈밭에 발자국 찍으면서 놀다가. 유치원에서 천사 만들기 하는거 들은 기억이 나는 거야. 그래서 엄마엄마, 천사만들기 하자 그랬지. 엄마는 천사만들기가 뭐야? 그랬고. 언니는 알았던 것 같은데 하기 싫어했던 것 같아.


눈밭에 누워서 팔다리 휘적휘적하면 천사 모양이 돼. 그랬지. 엄마는 그래 해보자 했고. 그래서 눈밭에 누우려는데 아무래도 좀 축축할 것 같은 거야. 그래서 하기가 싫었는데. 그래도 하고는 싶었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풀썩 누워서 휘적휘적했지. 근데 그렇게 누워있으면 또 못 일어나잖아. 그래서 엄마가 일으켜주고, 엉덩이는 다 젖고.


엄마가 감기 걸린다고 들어가자고 해서. 천사 만들기는 더 못하고 들어왔는데. 글쎄 내 천사는 별로 안 예뻤는데 언니는 예쁘게 만들었던 것 같아. 그날 이후로 또 해보고 싶어서 친구랑 또 가서 또 했었고.


근데 있지, 이런 기억에도 아빠는 없더라고. ***동에 살 때 아빠는 정말 내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거든. 유치원에서 아빠 뭐 하세요? 물어보시면. 아빠는 바빠요. 일 갔어요.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아빠는 뒤통수밖에 없었어. 아니면 혼자서 뭔갈 뚝딱뚝딱 만지고 있다던가.


옛날엔 그게 상처였는데 요즘은 별 생각 안 들긴 해. 아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공돌이고, 일밖에 모르고, 사회성은 좀 떨어지고, 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테지, 뭐. 이제는 나도 좀 컸고 사회생활도 하다 보니까 아빠가 좀 이해돼.


근데 아빠 신기한 게, 눈 오는 날 어린 시절에 아빠랑 언니랑 노는 걸 찍은 사진이 있었던 것 같아. 기억을 열심히 더듬다보니 어, 그런 사진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해.


그게 어떤 사진이냐면. 아빠는 엄청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있고. 언니는 그 옆에서 눈덩이에 손을 얹고서는. 양 갈래 머리에 핑크색 패딩과 핑크색 패딩부츠 같은 걸 신고. 꺌꺌 소리를 내며 웃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고. 아빠는 그 옛날 유행하던 잠자리 안경에. 지금보다 머리숱이 더 많은 젊은 날의 얼굴이고.


그런 걸 찍은 사진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어. 진짜 찾아본 건 아니거든. 그래서 진짜 그 사진이 있는 건지, 그냥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인지, 아니면 내가 기억하는 여러 모습을 조합해서 이어붙인 건진 모르겠네. 근데 그런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빠랑 같이 눈사람 만들면서 놀면 참 즐거울 것 같거든.


아빠. 요즘 아빠 어깨가 많이 굽었더라. 내가 사준 감색 잠옷을 위아래로 입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목은 거북목이 돼서는. 혼자서 안방과 주방을 왔다 갔다 하다가 혼자서 밥을 차려서 쩝쩝 먹고는. 괜히 내 방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라면 먹을래, 한 마디 물어보고 가고.


이젠 아빠랑 눈사람 만들면서 놀고 싶지도 않아. 그냥 그 시절은 너무 오래전에 지났고, 돌이킬 수 없고, 지금 나한테 필요하지도 않거든. 지금 나는 아빠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기를 채우고 있고. 어린 시절의 빈자리를 다른 여러 가지로 메꾸고 있어.


근데 아빠 가끔은 좀 슬퍼. 이젠 아빠가 날 보호해주는 든든한 벽처럼 느껴지지도 않고. 우리가 만들지 못하는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어주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도 않아. 근데 가끔은 아빠가 날 위해서, 아니다 그냥 나랑 같이, 눈덩이 만들면서 '아빠랑 노니까 재밌지?' 하면 어땠을까 싶어.


내가 아주 쥐방울만 할 때는 아빠가 나를 엄청나게 귀여워했던 것 같거든? 맨날 날 데리고 이불에 들어가 속닥속닥. 아빠가 비밀얘기 해 줄까 속닥속닥. 그랬던 것 같은데. 어째 아빠랑 눈사람 만든 기억은 없냐.


그냥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빠랑 눈사람 만들고 싶다는 건 아니고. 그냥. 아빠랑 같이 눈사람 만들었으면 꺌꺌 웃으며 즐거웠을 것 같다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말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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