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갑자기...

by 글쓰고돈쓰고

꿈속에서 어질어질함을 느끼는 중에 잠이 깼다. 눈을 떴는데도 어두웠지만 천장이 자꾸 돌아간다. 그야말로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안 갔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시력은 멀쩡하고 잠도 대충 깼는데 이상하게도 천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두가 일그러진 채로, '살바도르 달리'였던가 녹아내린 시계가 그려진 그림처럼, 방안의 풍경은 초현실적이 돼버렸다. 팔을 휘저어 옆에 책장을 만져보았다. 불행히도 촉감이 또렷하게 전해져왔다. 꿈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생각나는 것이 세 가지였다. 지금 죽을 수도 있겠다는 것, 그런데 나 혼자라는 것, 그래서 119를 불러야 한다는 것. 휴대폰을 찾았다. 어디다 두었더라. 속이 메슥거려왔다. 어지러우니 그럴 수밖에. 원인을 찾으니 구토증은 참을 만했다. 그런데 어지러움은 왜일까. 이유를 모르니 더 어지러웠다. 요의를 느껴 화장실로 가려고 일어섰으나 다시 주저앉았다. 어릴 적 코끼리 코를 하고 열 바퀴를 돌았을 때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벽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방바닥이 들썩인다. 폭풍우를 만난 일엽편주 마냥 방안은 요동을 쳤다. 가까스로 기어가다시피하여 화장실을 다녀온 후, 불을 켜고 휴대폰을 찾았다. 움직였더니 더욱 어지럽고 가슴은 뛰고 속은 메슥거리고 귀까지 사이렌 소리로 멍했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 잘 닦인 포장도로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요란스러운 건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리 차분할까. 흔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다섯 가지나 된다는데 거부, 분노, 타협은 훌쩍 건너뛰고 포기, 수용의 단계에 와 있는 양 아무 생각이 없다. 가만히 누웠다. 지나온 삶이래 봤자 50여 년, 한도 없고 흥도 없이 그저 밋밋하였음을 그제야 떠올린다. 당장 내일 해야만 하는 일이 산적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죽음을 뼛속 깊이 슬퍼할 직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들목 없이 목적지만을 향한 고속도로가 아니라 중간중간 쉬어 갈 수도 빠져나갈 수도 있는 인생의 길을 걸어왔으니, 도중하차한 들 아쉬움은 없다. 이것이 속세에 연을 두지 않은 생의 가벼움인가. 나의 마직막이 성직자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되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듯 했지만, 그놈의 울렁증 땜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 후 스르르 잠이 든 것밖에는. 몇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환한 빛에 깨어났다. 혹시 천상의 빛일까. 여느 아침보다 눈이 부셨으나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방안 깊숙이 들어온 햇빛 때문이라는 생각은 못 했다. 다행히 밤새 무사했나 보다. 더 이상 천장은 돌지 않고 벽은 덤벼들지 않으니까. 일단 안심은 되었어도 불안은 여전했다. 혹시나 더 큰 진폭으로 여진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입맛은 없고 기운은 처졌다. 창문을 여니 여전히 아침 공기는 상쾌했고, 출근하는 옆집 여자의 발걸음은 '또각또각' 경쾌했다. 나만 그런 아침 기운에 동화되지 못한 채 우울감을 느꼈다. 나에게 속한 것들도 주인을 잃어버린 듯 빛이 바래 보였다. 화분이 시든 것 같고 책장이나 가구가 어두워 보였다. 그렇게 밖은 환했으나 집안은 어두운,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병원은 가봐야겠고, 설마가 아닌 거의 확인하는 차원이라 여겨 망설이진 않았다. 어지러웠으니 뇌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어 내심 MRI 검사까지 각오하고, 진료 접수 후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난생처음 듣도 보도 못한 증상을 경험하고 나니 무슨 희귀병은 아닌가 긴장되었다. 요즘 공해도 심하고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은 현실이라 원인 모를 병들이 많다고 하던데, 곧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진찰실로 들어갔다. 무표정한 의사에게 지난밤의 증상을 말하였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나의 표정과 달리 의사의 얼굴은 미소까지 머금었다. 마침내...

이석증인데요, 라고 말했다. 지난밤에 겪었던 증세는 반세기를 넘게 살아온 나에게 처음 겪는 고통이었는데 의사는 내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확진해버렸다. 게다가 의사의 미소에서 이석증이란 게 별것 아님을 눈치챘다. 가슴에 묵직했던 무엇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석증이란 귓속에 이석(耳石)이 제위치를 잠시 이탈하여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물리치료 외에는 특별한 치료법도 없다 했다. 하지만 어지럼증을 동반한 증세가 워낙 요란스러워 처음 겪는 사람은 응급실까지 온다고 한다. 외상 말고는 명확한 원인은 없다는데 결국은...

'노화' 때문이란다. 노화는 나이 들면서 알게 모르게 슬며시 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제는 '간밤에 무서리'같이 처음치고는 갑작스럽게 온 것이다. 성장통이 있듯 '노화통'도 있다는 건가. 노안이나 관절염 등 이런저런 노화의 습격에 '노우(no)'라고 외치고 싶지만, 대자연의 섭리라 여기고 하나둘씩 받아들여야겠다. 그것이 삶의 지혜니까. 그러고 보니 지혜가 쌓이는 것도, 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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