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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Nov 07. 2019

라오스 기행

요즘 복용하는 한약의 반입을 위해 영문 진단서까지 준비하는 것으로 라오스 여행 준비를 마쳤다. 한의원에서 웬 영문 진단서라 할지 모르지만 옛날 한의원처럼 할아버지가 아닌 수능 고득점으로 한의대에 들어간 젊은 한의사라 영문 진단서도 일필휘지로 작성해주었다. 값비싼 한약을 먹는 우수고객이라 만 원의 비용도 마다했다. 한의원을 나오는데 날씨가 제법 싸늘하다. 여긴 점점 추워지는데 라오스는 30도를 웃돈다고 한다. 여행의 첫 번째 실감은 아마도 날씨에서 오는 것인지라, 추위에서 더위로의 급반전을 시작으로 이번 여행이 신기함과 놀라움, 즐거움과 깨달음으로 가득 찼으면 한다.  

 

엔진이 좌우 하나씩인 것만 봐도 소형임을 알 수 있다


아직 라오스로 가는 여행객이 많지 않아 비행기는 작다. 대형점보기를 탈 때는 저 큰 게 과연 뜨기는 할까 걱정이고 소형은 저 작은 게 우릴 태우고도 뜰까 걱정이었다. 이래저래 비행기는 불안 속에 날아간다. 항상 짐짝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좌석은 고역이다. 더욱이 밖은 보이지 않아서일까. 아리따운 스튜어디스만 보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일등석이 괜히 비싼 게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그 가격이면 현지 여행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계산에 공짜표가 아닌 이상 일등석은 내 몫이 될 리 없겠다. 일등석과 동등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오직 잠자는 것일 테다. 수면 중에는 시간의 지루함도 좌석의 불편함도 단꿈 앞에서는 무감각해질 테니까... 와인이나 한잔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저기요... 와인 좀 부탁합니다." "손님 물 밖에 서비스가 안되는데요..." 아차 비행기가 저가항공이었지. 진짜 짐짝이 된듯한 느낌... 그냥 가만히나 있을 걸.


태국은 물론이고 필리핀이나 베트남보다도 가난한 라오스는 아시아에서 최빈국에 속한다. 물가만 보더라도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할 정도로 단위가 크다. 웬만한 과자 한 봉지에 10,000낍이 넘으니 항상 계산할 때 돈뭉치를 건네는 기분이다. 게다가 여기는 동전도 없고 아라비아 숫자와 라오스 숫자가 함께 표기되어 있는 500에서 100,000낍까지 8종의 화폐를 골고루 배합하여 계산하려면 더더욱 복잡하다. 화폐인물도 2,000낍부터는 이 나라 국부 격인 사회주의 건국자 한 사람으로 통일되어 있어 돈을 계산하려면 익숙한 아라비아숫자부터 찾아야 한다. 역시 추위에서 무더위로 급반전에 해당하는 체험이다.


만낍짜리 화폐인데 아래의 라오스 숫자로 보면 9만낍 같다


비엔티안 공항에 도착하니 열대야의 후끈함이 우릴 맞이해주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공항에 내리면 그 나라 특유의 냄새가 난다. 일본도 그랬고 뉴질랜드도 그랬다. 같은 동남아인 필리핀과도 다른 냄새가 난다며 근래에 필리핀을 다녀온 동행인 친구도 신기한 듯 말했다. 그것은 여행지의 첫인상이다. 냄새라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형식이라면 그것은 내용이다. 보이는 피상적인 것에서 한 발짝 더 다가선 기분이랄까. 그 나라 삶의 풍미로 여겨지는 그곳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문화가 빚어낸 고유함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것은 열대몬순기후의 바람과 이에 어울리는 향신료 내지는 불교국가이기에 여기저기 늘 피우는 향내의 어우러짐이 아닐까.

우리나라 여관급의 숙소는 생각보다 고급스럽고 정갈했다. 복도나 계단, 객실의 마룻바닥이 나무로 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짙은 적갈색의 마호가니(Mahogany) 원목으로 된 내부 마감이나 가구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일 정도로 약간 낡아서인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들은 진짜 유화 그림으로 샹들리에풍의 전등과 잘 어울리며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잔재를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에게도 같은 아픔이 있는지라 전남 벌교읍에 적산가옥으로 된 보성여관이 생각났다. 10만 원이 넘는 그곳 숙박료에 비해 여기는 2만 원밖에 안된다는 저렴함을 생각하면 인테리어의 고급스러움을 가격에 반영하지 않은 이곳 사람들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면 그것이 고급스럽다는 것조차 모르는 원초적 순진함일 수도 있겠다.



날이 밝았다. 간밤에 에어컨은 쾌적한 잠을 마련해주느라 밤을 지새워서 그런지 바람이 약해진 것 같다. 아니 잠결에 좀 추운 것 같아서 약하게 조정한 기억도 난다. 창밖을 보니 잎사귀가 크고 덩굴진 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왔다. 당장 나가서 바나나와 망고 등 열대과일들을 채집하여 아침식사를 차릴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가 보니 무늬만 열대나무들이고 열매는 원숭이가 다 따먹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기대했던 예수님이 가까이 갔지만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하자 그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리셨다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사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잎사귀보다 먼저 열리는 특성이 있어서 그랬지만 지천에 깔린 이곳 열대나무들은 왜 하나도 열매가 없는지, 우리나라엔 철마다 버찌며 살구, 감, 가로수엔 은행이 후두두 떨어지는데... 아쉽긴 했지만 이 실망을 저주 대신 돈으로 해결했다. 바로 길거리에서 코코넛이랑 바나나를 사 먹은 것이다. 코코넛은 우리 돈으로 1,700원, 바나나는 5개에 1200원 정도였다. 저렴한 가격에 아침을 해결했다. 코코넛 음료는 약간 찌릿한 게 이온음료 같고 구운 바나나는 꼭 고구마 맛으로 따뜻하니 한 끼 밥 먹는 기분이다. 모두 처음 먹어 보는 것이라 신기함에 맛있었다.


코코넛을 다르는 솜씨가 퍼포먼스 그 자체였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니까 웃음으로 대답하고 어색함으로 포즈를 취했다


10시도 안됐는데 벌써 해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세 낸 승합차를 타고 150km 떨어진 방비엥으로 향했다. 아직 시외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하지 않아서 이렇게 가는 것이 편하고 경제적이란다. 이런 자가용 영업이 성업 중이고 운전이 고급 기술이라 벌이도 괜찮다고 한다. 어차피 산업사회로의 과정은 어느 나라나 비슷하기에 마치 우리의 6,70년대를 보는 것 같다. 그 당시 우리도 '운짱'이라 하여 운전사들이 대우받는 시절이 있었다. 트럭이나 버스일 경우 옆에 항상 조수를 데리고 다니며 기술 전수하듯 '문하생'으로 삼았었다.

라오스는 아직 고속도로가 없다. 도로공사도 없기에 곳곳에 도로가 파인 채 방치되어 있고, 비포장도 있고, 차선도 있는 둥 마는 둥 있어도 흐릿하고, 차량 사이사이로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고, 그런 오토바이를 추월하고자 중앙선을 넘기도 하고, 길가엔 자전거가 도로와 인도를 넘나들며 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산 같은 양산을 들고 한 손으로 아슬아슬 자전거를 타는 아가씨도 있었다. 강렬한 햇빛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피하고 말겠다는 젊은 미모의 열정이 보였다. 차량의 속도로 보아서는 고속도로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일반도로요 자전거가 줄지어 다니는 걸 보면 자전거도로일 텐데, 이 모든 기능이 한 도로에서 가능한 걸 보면 혼돈 속에 이방인이 알지 못하는 어떤 질서가 있는 것 같다.

세 시간의 곡예운전에 시달리며 방비엥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결국 속이 울렁거렸다. 차에서 내리니 한낮의 땡볕으로 화덕을 이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열기가 내리쬐는 태양빛을 젊음의 열정으로 즐기기에는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일단 시원한 바람이 내리 부는 에어컨으로 중년의 노독을 날릴 뿐이다. 방비엥은 유서 깊은 곳이라기보다는 레저를 위한 휴양지다. 한때 예능프로 '꽃보다 청춘'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서 특히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간판이나 노점의 가격표에 한글이 많이 쓰였고 심지어 한국말로 호객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사람도 보이고 한국말도 들리니 멀리 해외여행 와서 나만이 유일하게 한국적(的)이었으면 하는 로망으로 이국의 정취를 물씬 느끼고 싶은 소망이 깨져버렸다.


방비엥에선 주로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음식도 사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생활전선에서 열심으로 뛰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채 부모님 장사를 돕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고 한낮 땡볕이라  거리의 사람들도 드물고 공사판의 인부들도 쉴 수밖에 없는 시간임에도 어김없이 수레를 끌고 나와 뜨거운 철판에 갖은 재료를 볶아 파는 아줌마도 있었다. 저녁 해 질 무렵 숙소에서 나오니까 십여 미터 간격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뭔가를 펼쳐놓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는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금에 로또를 판다고 한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뿐인데 요행을 바라는 기대수준이 세 배나 된다는 얘긴가. 그만큼 로또 수익이 많아져서 공익기금으로 널리 쓰이길 바랐다.  


어린 학생이 복권 손님을 기다리며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했다

라오스 사람들이 순박한 만큼 거리의 개들도 순했다. 그래서 풀어놓고 기르나 보다. 2박 3일 있는 동안 정말이지 개가 짖는 것을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의 뒷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보통 조금만 인기척이라도 나면 귀가 쫑긋해지며 그쪽으로 순발력 있게 고개를 돌려 마주 보는 게 개의 습성이다. 나는 그 뒷모습이 그리 짠한지 몰랐다. 누굴 기다리는지 멀리 한 곳을 응시하는 개의 뒷모습에 그 작은 짐승에도 그리움이 있고 생각이 있고 본능에 감성이 곁들인 존엄한 생명체라는 걸 깨달았다.


뒷모습에서 살짝 들어 표정까지 담아 보았다


방비엥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블루 라군으로 출발했다. 짐칸에 사람이 탈수 있는 개조 트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비포장도로를 덜덜 거리며 달리다가 갑자기 서행하더니 아예 정지하였다. 소떼들이 지나가는 것이다. 여기는 그야말로 개나 소나 방목이다. 마른 소들이 때론 수십 마리가 줄지어 길 한복판을 휘젓거나 아예 서있기도 하였다. 운전사는 클랙슨 한번 울리지 않고 기다린다. 모든 것이 정지하여 있는 순간, 덕분에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있고 경치 좋은 산세에 한적한 도로 위로 소가 어슬렁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었다. 카약이 쌓여있고 짚라인을 탄다거나 동굴 탐험을 한답시고 분주한 분위기의 방비엥과는 대조적이었다.

블루 라군에 직접 가보니 그것은 이름 그대로 푸른 빛깔의... 그러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웅덩이일 뿐이었다. TV나 SNS의 현란한 사진이나 글귀에 혹했던 것이다. 오히려 밑바닥까지 보이는 맑은 웅덩이가 청정하다는 느낌으로 더 좋다. 불은 타오르고 물을 맑아야 본질에 충실한 법이다. 남자는 씩씩하고 여자는 청순해야 하듯이... 랄까. 투명한 계곡물에서만 몸을 담가봐서 그런지 때깔은 좋지만 탁한 물속에서 갑자기 악어나 물뱀이 나오지나 않을까 괜히 긴장되었다. 그런데 더 긴장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다이빙이다. 사람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기에 나도 올라가 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볼 때랑 다르게 막상 올라가 보니 너무 높았다. 수면은 저~ 아래에 있었다. 뛰어내리면 시퍼런 웅덩이가 나를 심연 속으로 빨아들일 것 같았다. 곧바로 다시 내려왔다. 그냥 기다시피. 하지만 여행까지 와서 좌절을 겪을 순 없다 하여 심기일전,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뛰어내렸다. 순간 물속 깊이 내려갔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수초 동안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어머니 뱃속 수중의 태아가 된듯한 느낌이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태초의 한 방울 물이 바다와 강과 호수가 되어 이 땅을 푸르게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 과학 너머로 무언가 있긴 할 것이다.           


사진 가운데 나무가지 위에 한 사람이 다이빙 하려고 서 있다


다음날 아침 잠결에 불경소리가 들려 급히 나가보니 짐작한 대로 TV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본 시주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모두가 경건한 마음으로 음식을 건네주고 받는 의식이 치러졌다. 조금씩 담아주는 손길이지만 불심과 정성은 한가득으로 보였다. 스님들이 암송하는 경전 소리가 성과 속을 구분 짓는 메아리로 퍼져 나갔다.

 

시주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하고 경건하다


라오스에 와서 '뚝뚝이'는 한번 타봐야 할 명물이다. 오토바이를 삼륜차로 개조하여 뒤에 사람이 탈수 있는 이동 수단으로 타기 전에 가격을 협상해야 한다. 곳곳에 놀고 있는 뚝뚝이가 많은데도 가격은 물렁하지가 않았다. 결국 운전사가 부르는 가격 그대로 정하고 올라탔다. 하긴 깎아봐야 우리 돈으로 몇 백 원일뿐이다. 우리는 재미로 깎으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들에겐 그것이 생계요 희망일 것이다. 막상 올라타고 출발하니 복병이 있었다. 배기통이 뒤 칸 바로 밑에 붙어있어서 우리는 바로 배기가스에 노출되었다. 매캐한 냄새가 그대로 맡아져서 괴로웠다. 속도도 빠르지 않아 배기가스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운전석 바로 뒤에 비닐봉지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밥이랑 반찬이 들어있는 도시락으로 차량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왠지 밥이 아니라 삶이 저 비닐봉지 속에서 시달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운전사와 오버랩되면서 밥벌이의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네들의 삶이나 우리들의 삶이나 인생은 그렇게 시련을 견뎌내며 살아내는 것인데, 그래 이까짓 매연쯤이야...


노란 비닐 속의 밥이 더위에 쉬질 않길 바란다


저녁에는 재래시장에 가봤다. 젓갈류가 많았는데 파리는 더 많았다. 상인들은 반찬 파는 것보다 반찬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 보였다. 선풍기로는 미약한지 각자 부푼 비닐봉지를 막대에 매달아 '적극적으로' 파리를 쫓았다. 한 곳에서 파리를 쫓으면 그 파리가 옆 가게로 가서일까, 한번 휘저으면 동시에 모든 상인들이 휘젓는다. '퍽퍽'하는 비닐봉지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니 우리네 시장의 호객이나 흥정하는 소리 같았다.


좌판의 반찬들은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생소하다


파리를 쫓는데 풍선같은 봉지의 위력은 대단하다


아침에 산책하는데 유난히 자주 눈에 띄는 나무가 있었다. '짬빠'나무로 여기서 피는 꽃이 이 나라 국화란다. '독'은 꽃이니 '독짬빠'가 국화 이름이다. 라오 항공 꼬리날개에도 독짬빠 문양이 있다. 하얀색, 노란색 꽃도 있다. 그 나라에서 젤 흔한 걸 국화로 삼는 것이 당연한데 우리나라는 왜 무궁화인지...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고 지고 또 피고... 를 반복하는 그 근성때문에 국화로 삼은 건가. 진달래보다도 친숙하지 않은 꽃이기에 너무 작위적인 선정이 아닌가 싶었는데 독짬빠는 이방인인 내가 봐도 당연 국화로 삼을 만 하다.


오롯이 피어난 한 송이의 독짬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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