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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Sep 14. 2019

은행을 털다

가을만 되면 지자체는 고민에 빠진다고 한다.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돈 맡기는 은행이 아니라 낙엽 떨어지는 은행 말이다. 주민들이 가로수에 은행이 열리면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은행을 주워 담기 때문이다.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은행나무 열매를 무단 채취하고 가로수를 손상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게 되어있고 경범죄 처벌법상 자연훼손이나 형법상 절도죄에 해당될 수 있다. 법적으로 가로수의 은행은 지자체의 소유로 되어있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엔, 껍질을 깐 은행이 500g에 만 원 정도 하니 길거리에 짓밟히는 게 아깝기도 하다.


은행나무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그것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그 큰 몸집으로 그늘도 내주고 한 계절을 노랑으로 물들이고 은행열매로 우리의 맛과 건강을 지켜준다. 최근에 나뭇잎의 효능도 밝혀져 혈액순환에 좋다고 한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단지 내 은행나무를 모두 벚꽃나무로 교체한 적이 있어 무척 안타까웠었다. 오로지 봄에 보름 남짓한 개화를 위해 은행나무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다. 봄보다 가을, 꽃보다 단풍이 더 깊이가 있는데... 요즘 들어 가로수로 벚나무가 유행하는 것 같다. 짧으나마 벚꽃은 아름답지만  6월 버찌가 떨어져 그 주변이 검붉은 색으로 얼룩지는 것은 신록이 푸른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색상으로 테러에 가깝다.


은행나무는 겉씨식물이다. 따라서 은행은 열매가 아니라 씨앗이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표피는 씨앗을 보호하는 것이지 과육이 아니므로 냄새가 고약하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싹을 틀 테니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직하다. 단맛 나는 과육으로 사람과 동물을 유혹하여 멀리 가려는 세련된 전략이 아니다. 은행나무는 현존하는 식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무려 2억 5천만 년 전 지구 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고생대 말 페름기에 출현했으니 중생대인 공룡보다도 먼저다. 이후로 몇 번의 혹독한 빙하기까지 견뎌내느라 가까운 친척은 모두 없어져버려 은행 나무과엔 은행나무 하나뿐이다.


겉씨식물은 대부분 오랜 세월을 지낸 것으로 소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만하다. 또 암수가 구별되어 주변에 수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봄에 꽃이 필 무렵, 수은행나무의 꽃가루엔 다른 식물과 달리 편모가 달려있어 바람을 타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바로 앞이 아닌 수백 미터 떨어진 암나무를 찾아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암수 나무의 사랑을 본받아 예로부터 경칩이 되면 남녀가 은행을 서로 입에 넣어주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진정 우리의 밸런타인데이인 것이다.


사랑과 은행나무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에서 데이트 코스로 최고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연인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현재의 시립미술관이 과거엔 가정법원이었기 때문에 연인이 걸어가는 걸보고 이혼하러 가는 커플로 오해를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미술관과 정동극장, 외국 공관이나 고궁 등 가볼 만한 곳이 많기도 하지만 가로수로 오래된 은행나무들이 한몫을 하기에 인기가 많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면 그 인기도 절정에 이른다. 괴테가 가운데 끝이 갈라진 은행잎을 보고 예순여섯의 나이에 서른다섯 살 연하인 연인 마리안네에게 바친 시가 있다.


본래 하나의 잎새인 것이 둘로 나뉘었을까?

딱 어울리는 두 잎이 맞대어 놓여 하나처럼 보일까?


서양에서는 자신의 연인을 'the better half' 라 부른다. 사랑에 겸손까지 얹었다. 남녀는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완전함으로 거듭나나 보다. 유럽인들의 공감을 사서일까. 괴테의 시 덕분으로 중국, 일본,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했던 은행나무가 유럽 도심공원에 많이 퍼져있다고 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의 나무, 은행나무는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다. 앞서 말한 지자체는 개인이 아닌 단체에게 채취권을 허가하여 버려지는 은행이 없도록 하겠단다. 전문 '은행털이'의 양성화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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