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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Nov 30. 2019

검사와 여선생

“검사와 여선생이 시작되었습니다”변사의 구성진 목소리가 뜬금없이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시작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로 화면에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48년의 시대상이 펼쳐진다. 카메라는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어릴 적 시골에서나 보았음직한 기와집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동네에 지게를 진 물장수가 돌아다니고 곳곳에 박혀있는 나무 전봇대 위로 치렁치렁 전깃줄이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다.



아침 출근시간 전철 아닌 전차 한 대에 앞뒤로 줄이 기다랗게 늘어서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신문 한 장 책 한 권이라도 팔려는 교복 입은 고학생의 간곡함이 긴 줄을 잠시 끊기도 한다. 여자들에겐 무채색의 한복 차림이 일상이고 남자들 역시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두텁지 않은 의복을 겹겹이 둘러 바람을 막을 뿐이다. 너도나도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저런 때가 있었나. 새삼 멀게만 느껴졌다. 수백, 수천 년 전의 역사는 이미 관념 속에 박제되어 먼지만 쌓인 채 그대로지만 불과 수십 년 전은 현재를 갓 지난 따끈한 과거이기에 약간의 차이에도 자신의 체험적 비교를 통해 증폭된다.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지금이 살만한 것일까. '검사와 여선생'이란 제목을 보았을 때 나는 통속으로 찌든 현대인으로서 바로 불륜을 떠올렸다. 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 남자와 여자가 등장했을 때 요구되는 갈등의 구조란 '순탄치 않은 사랑'일수록 흥행면에선 순탄한 법이다.


어렸을 적 검사는 앳된 여선생의 초등학교 제자로 나온다. 그렇다면 연상연하요 선생과 제자의 사랑인가. 지금의 프리즘은 그 정도까지 확대되고 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창작의 자유는 활개를 치게 마련이다. 실제로 영화 '아름다운 청춘'(1995), '여선생'(2017)은 모두 여선생과 제자와의 사랑을 다룬다. 또 다른 변주로 '여선생 vs 여제자'(2004)는 새로 부임한 총각선생을 두고 삼각관계를 코믹터치로 풀어낸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훗날 검사로 나오는 창선은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몸 져 누우신 할머니와 함께 가난을 이고 산다. 도시락을 싸가기는커녕 아침밥도 할머니 몫으로 남겨놓느라 한술 뜨다 말고 등교한다. 그것도 하루 이틀, 결국 허기진 탓에 체육시간에 쓰러지고 만다. 이를 계기로 담임이던 여선생은 제자의 가난을 돌보며 자신의 도시락도 넘겨주고 간식도 사주면서 창선을 격려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선생은 학교를 떠난다.



조회시간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고별사를 들으며 창선은 실의에 빠진다. 여선생은 기차역까지 배웅 나온 창선과 헤어지면서 자신의 통장과 도장을 건네준다. 마지막 정성이라며 창선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말과 함께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로 제자를 감싸준다. 선생도, 창선도 울고 변사도 울었다. 변사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흑백의 흐릿한 화면이지만 배우들의 눈물은 반짝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러한 동정이 애정이 되고 은혜를 사랑으로 갚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당시는 액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던 시절이었다. 나오는 등장인물마다 남자든 여자든 어김없이 오대오, 이대팔 심지어 일대구(주로 대머리인 경우)까지 반드시 있었던 그때의 가르마는 권선징악, 결초보은, 사필귀정 등을 주장하는 '올곧은 길'처럼 보였다. 모두가 '교과서'를 지향했던 시절, 그것은 개인주의나 다원주의 이전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었고 당연함이었다. 한 번은 월세가 밀려 집주인이 창선이에게 돈 대신 물건으로라도 갚으라며 할머니가 덮는 이불을 가져가려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여선생이 창선의 집을 방문하였다. 무슨 일이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창선은 말한다.



이 말에 바로 여선생은 집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다. 예상치 못한 대답과 인사에 집주인은 멋쩍어 하면서 "어이구 이거 늙은 놈이 무슨 창피람, 어이구 참" 을 연신 되뇌며 그냥 가버렸다. 남을 원망치 않은 창선의 착한 심성이 마중물이 되어 집주인 할아버지의 인정을 퍼올린 것이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시추에이션들'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특히 여선생은 결혼 후에도 반듯한 성품과 사랑의 실천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오히려 여선생으로 하여금 수갑을 채우게 하였으니... "아, 이 무슨 하늘이 통곡하며 산천이 요동칠 일이란 말인가!!" 변사는 울부짖는다. 영화는 얄궂은 운명이 하루아침에 단란한 신혼을 송두리째 망쳐놓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결혼한 여선생이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던 어느 날, 남편은 출장을 가고 혼자 집에 있는데 장안에 수배 중인 탈옥수가 침입한다. 탈옥수는 여선생에게 들키자 칼로 위협했지만 오히려 여선생의 인정 어린 반응에 무너지고 만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얼떨결에 살인까지 한 죄인이지만 발단은 생계에 있었기에 용서는 못 해도 동정은 할 만했다. 혼자 남은 어린 딸이 보고 싶어 탈옥했다는 말에 여선생은 눈물을 흘린다. 때마침 자신이 돌봐주곤 했던 동네의 불쌍한 여자애가 집에 찾아오는데 공교롭게도 탈옥수의 딸이었다. 두 부녀는 눈물의 상봉을 하고 이를 불쌍히 여긴 여선생은 그들을 숨겨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주변을 순찰 중인 경찰에 들키고 여선생은 도망가려는 탈옥수를 설득시켜 자수하게 한다.


감옥에 재수감된 죄인을 누가 돌보랴 싶어 여선생은 주변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감옥에 들러 사식을 넣어준다. 운명은 이 대목에서 심술을 부린다. 옥바라지를 하는 여선생과 탈옥수의 관계를 순수하게 보지 못한 동네에서는 소문이 나돈다.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동네의 소문을 듣고 아내를 의심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로 아내를 닦달하며 전후 사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흥분한 남편은 아내를 위협하려고 부엌에서 식칼을 든 채 방으로 들어온다. 바로 이때...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만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아내는 살인죄로 오랏줄을 받는다.



아, 문지방... 더 높거나 아예 없었으면 걸려 넘어질 일도 없을 텐데. 어정쩡한 높이가 운명의 문턱이 되고 말았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 결혼한 새댁으로서 바깥출입에 신중을 기하며 특히 인간관계 이전에 남녀관계의 테두리가 있음을 여전히 간과해서는 안 되는 시절이었다. 경계가 모호해진 것을 다원주의나 개성으로 포장하는 바람에 원칙이 사라져버린 지금과는 달랐다. 또렷한 가르마만큼이나 투철한 경계심이 요구되었다.


하루아침에 감옥신세를 지게 된 여선생은 법정에 서는 날 또 한 번의 운명을 맞이한다. 십수 년 만에 자신의 옛 제자 창선을 만나는데, 자신을 변호하는 게 아니라 단죄하는 검사로서 마주한다. 이 또한 운명의 문턱이 되었을까. 검사는 선생님이 어렸을 적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이야기하며 논고를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이는 변호사의 변론과 함께 오히려 운명의 발판이 되어 여선생은 무죄를 선고받는다. 형무소 문을 나올 때 마중 나온 검사는 그 옛날 선생님에게 받은 목도리로 그분의 어깨를 감싸주며 감회에 젖는다.



영화는 이렇게 미담으로  끝난다. 60여 분 동안 무성의 영화를 보면서 오로지 변사만의 울고 웃는 목소리에 기대어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숯장사를 하는 동네 아저씨 수동이가, 이 많은 숯을 어디에다 배달할까요...라고 묻는 점원에게, 응 검사와 여선생을 보는 관객들에게 배달해 드려라는 대목에서 변사의 위트를 느꼈다. 미담과 위트가 안 그래도 팍팍한 서민들의 삶에 산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변사는 마지막으로 목청을 높인다.


“얄궂은 운명에 살았던 외로운 여선생의 나머지 반평생을 민 검사가 길이길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검사와 여선생... 이것이 검사와 여선생의 끝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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