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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Dec 04. 2019

대화가 필요해

전철에 앉아서 가는데 내 옆자리로 웬 청년과 중년의 아줌마가 나란히 앉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러 두 사람 사이는 아무런 관계가 아닌듯했다. 하지만 청년의 또렷한 목소리로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곧바로 모자지간임을 드러냈다. 아들이 주로 묻고 엄마가 대꾸하는 그들의 대화에서 질문은 상냥했고 대답은 무뚝뚝했다.  


-외삼촌은 잘 가셨데?

-잘 갔겠지 뭐, 궁금하면 니가 전화해보지

-아니,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데...

-한번 해서 되니? 외삼촌 귀가 안 좋잖아

-보청긴 안 끼신데?

-보청길 왜 끼니, 아직 짱짱한 나인데...


이런 식의 대화가 끊이지 않고 두 모자 사이에 오고 갔다. 가끔가다 이놈아, 자식아, 새끼야 까지 뒤섞인 엄마의 말투는 21세기인 요즘, 아들~ 하는 비음 섞인 화법과는 한참 동떨어졌길래 자꾸 곁눈질을 하게 했다. 왠지 신선했다. 이 상황이 나에겐 '뉴트로'였다


옛날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젊은 엄마는 어린 아들을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야단치다가 급기야는 빨개벗겨 대문 밖에 세워놓기까지 했었다. 이를 보고 어른들은 아이고 저놈이 큰 말썽을 부렸나 보네, 하였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중엔 또래의 여자애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는 얌전히 서있었다. 반성을 하는 것인지 이 고비만 넘기면 또 내 세상이라며 내성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 지금이야 아동학대로 당장 고발감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애를 탓했지 엄마를 나무라진 않았다. 아이를 개똥이 쇠똥이 하면서 내깔려 방목했던 시절의 끝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 옆의 두 모자는 간혹 거친 말이 튀어나와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구수했다. 얘도 어릴 때 빨개 벗겨 자랐나. 그렇담, 이 시대의 마지막 개똥이리라. 엄마가 퉁명해도 아들은 두런두런 다 받아주며 계속 이야기를 꾸려 나갔다. 어쩌면 오늘만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아들이 짜증 냈을지도, 아니면 내일 그럴지도. 이렇게 어느 누가 나서면 다른 한쪽은 물러서는 상황이 탁구공처럼 주거니 받거니 할 것이다. 중요한 건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게 아닐까. 거칠든 부드럽든 말을 주고받느라 각자의 휴대폰은 끼어들지 못했다. 흐뭇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엄마는 내 차를 타면 항상 뒷자리에 앉으셨다. 허리가 아파 누워가기 위해서다. 담요도 있고 쿠션도 다 엄마 전용이었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엄마는 누워만 있지 않았다. 차가 막히면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고 앰뷸런스 소리가 나면 역시 창밖을 살피며 염려하셨다. 내가 어쩌다 급정거하면 다시 벌떡, 가까이 클랙슨 소리가 나면 또다시 벌떡 일어나 룸미러에 당신의 얼굴을 커다랗게 디밀었다. 그때마다 면허 없는 엄마는 운전사인 나에게 가타부타 참견부터 했다.


-왜 이리 붙어 가니... (안전거리 유지)

-빵 눌러 봐... (클랙슨으로 경고하기)

-한 차선으로 가지... (끼어들지 말기)

-와이퍼 해... (안전 시야 확보)

-천천히 좀 가... (과속 금지)

-아이쿠!!... (과속방지턱 유의)


그리고 항상 어디쯤 가고 있나 체크하셨다. 현 위치를 모르면 답답하신단다. 난 어디쯤이라 대답하며 한마디 덧붙인다. 엄마는 입으로 운전하시네~


당신의 따분함을 나에게 떠넘기며 이렇게 참견을 빌미로 엄마는 '운전사와의 잡담'을 도발하셨다. 한 가지 일에만 몰입하는, 사실 멀티를 못하는 나는 여자친구와 드라이브할 때도 눈 크게 뜨고 운전하느라 좀처럼 입을 열지는 못했다. 운전을 잘하는 편인데도 엄마의 끼어들기는 매번 신경 쓰였다. 그래도 띄엄띄엄 맞장구를 쳐주면 엄마는 신이 난 듯 더 많은 말로 좁은 실내공간을 채웠다. 끝없는 말들이 여전히 샘솟는 듯 누에고치의 실타래가 술술 풀려나왔다. 그렇게도 할 말이 많았을까. 아들을 앞세워 두런두런 내놓는 이야기는 칠십 대 노인의 전부였겠지만 정작 아들은 일부분만 받아들였다.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좋은 것만...


-이번에 복지관에서 가을 소풍 간다더라. 큰맘 먹고 버스까지 대절해서 간 데. 거기 단풍이 그렇게 예쁘다는데, 날씨가 좋아야지 뭐

-그러게...


-아무개 권사네 차 타보니 좋더라. 에이~ 우리도 큰 차로 바꿀까.

-진짜?   있으셔? 좀이따 알아볼까?  현대차보다 르노삼성이  좋더라, 묵직한게.


-다음 주 목사님이 심방 오신다는데 집안 청소 좀 해 놔야지,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집안의 이미지는 화장실부턴데.

-그런가...


-토지보상금이 곧 나올 것 같다고 연락 왔더라.

-그래? 언제쯤? 대책 회의가 언제야? 이번엔 꼭 가봐야지. 엄마도 같이 가셔~


-누구 아들은 장가들어 바로 애 낳았다더라. 그이는 요즘 손주 보는 맛에 산데.

-...............


이제 생각해보면 후회가 든다. 엄마의 그 많은 말들을 지금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다. 있을 때 잘 해야지 중에도 백미는 '들을 때' 잘 해야지임을 깨닫는다. 용돈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정을 드리는 거니까. 부모님이 오래 사시면 뭐 하나. 함께 살기는커녕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전화도 못 드리면 아무 소용 없으련만. 대화를 하며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일단 그 부모는 장수한 것 못지않다. 부모는 자식에게 의미를 두니까.


부모님 돌아가시고 뒷자리가 텅 빈 르노삼성차는 너무나도 허전했다. 이차가 이리도 컸었나? 내가 미니 쿠페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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