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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Dec 11. 2019

바이올린으로 인생을 배운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바이올린 목에 해당하는 팔뚝만 한 길이의 지판(fingerboard) 위에는 수많은 음들이 숨어있다. 왼손 네 개의 손가락이 어떤 순서와 어떤 박자로 어느 부위를 누르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음들의 조합이 '찌고이네르바이젠'도 되고 '파사칼리아'도 된다.


피아노인 경우 그 뚜껑을 열면 88개의 건반이 뷔페식당에 가지런히 차려놓은 음식처럼 보인다. 먹고 싶은 음식을 바로 먹을 수 있듯 건반의 위치에 따라 누르기만 하면 바로 그에 따른 음이 난다. 이와 달리 바이올린은 '바로'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숨어있는 음들을 정확히 짚어서 찾아내야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을 정성 들여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신속 정확하게 딱 한 번의 손놀림으로 말이다.


처음 바이올린을 배울 때 새까만 지판 위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찾아내는 것이 힘들었다. 기타처럼 '프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표시 없는 허허벌판에서 오직 손끝의 감각만이 내비게이션이었다. 윈도 이전 시절 컴퓨터를 켜면 새까만 화면 위로 깜빡이는 커서를 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방금 짚은 곳을 또다시 짚어도 같은 음을 좀처럼 내주지 않는 이 악기는 성격 까칠한 새침데기 아가씨다. 손을 잡기는커녕 언제 한번 방긋 웃어주기라도 했으면...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 때 드러내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는 벌써 도도함을 풍기며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악기 중 사람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다는 바이올린, 특히 고음부는 여성의 칸타타를 연상케 한다. 연습 중에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칸타타는 '삑사리' 음을 내며 쏘아붙인다.


"내가 쉬워 보여?"


그러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없는 길을 만들 수밖에, 무한반복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각각의 음을 지판에도 새기고 귀에도 새겨야 한다. 여태껏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배웠다. 한두 번 해봐서 아니다 싶으면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며 털어내는 것이 현명하다 여겼다. 이렇게 우직하게, 한 방향으로 가고 또 가본 적이 있었던가. 비록 목숨 걸고 나가야 할 만큼은 아니지만 취미 또한 도전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가슴이 설렌다.


일단 바이올린의 생김새에서 수백 년을 넘나드는 고풍을 볼 수 있어 좋다. 21세기 최첨단의 시대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 모습이 방 한 켠에서 시간의 블랙홀이 된다. 이 악기로 비발디도, 파가니니도 청중을 매료시켰다 생각하니 다시 보게 된다. 그들과 똑같은 악기로 똑같은 자세로 폼을 잡아본다. 언뜻 파가니니의 악마성인 듯, 사라사테의 집시풍인 듯, 뭔가가 송진과 단풍나무의 향기 속에 스며있다.


변하는 게 미덕인 이 시대에 울림통의 곡선미와 활대의 유려함을 보면 여전히 감탄이 나온다. 옛날 사람들은 어찌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냈을까. 소리의 울림과 활털의 탄력을 최대치로 하면서 미학과 낭만까지 챙겼다. 이는 장인들의 열정이며 대중들의 음악 사랑이 받쳐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양새 그대로 지금까지 전해졌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증명한다. 연주자의 땀과 고뇌가 오랜 세월에 버무려 녹아든 흔적은 곳곳에 흠집이나 생채기로 연출된다. 이것은 영광의 상처요 노장의 범접치 못할 포스다. 오래된 바이올린을 중고라 하지 않고 '올드'라 하는 이유다.


baher366, 출처 Unsplash


기술과 효율을 앞세우는 요즘 시대에는 이런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 전자바이올린의 몸통은 약간의 테두리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음을 내는 지판과 네 개의 줄만 남았을 뿐, 울림은 기계가 해주기 때문이다. 기계가 미학과 낭만을 삼켜버렸다. 무대엔 앰프가 증폭한 소...음과 현란한 율동만 요란하다. 진동과 공명을 이용한 자연의 울림이 사라진 무대에 과연 청중의 감동이 밀려올까. 흥분이라면 몰라도...



에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이올린을 쥐어본다. 역시  전통을 거머쥔 느낌이다. 나는 정통 바이올린의 길을 가련다. 뒤늦게 시작한 취미라 주변을 맴돌더라도 올쏘독스(orthodox)만큼은 포기 못한다. 정통한 길이 결국 탄탄대로다. 이제껏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바다. 성인 취미생이라고 귀에 익은 달달한 영화 ost  쎄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잡으려는 레슨쌤한테 한마디 한다.


“선생님, 저는 전공생 레슨처럼 기초부터 튼튼히 배우고 싶은데요, 진도엔 욕심 없어요.”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 ‘목표보다 과정’이라야 즐길 수 있으니까. 두세 시간 연습해서 한 발도 아닌 반발만큼만 나아갔다 하더라도 뿌듯함이 올라온다. 수능이라면 목표한 점수대가 있을 것이고 인생이라면 목표한 가치 또는... 액수(?)가 있을 것이다. 도달하기 전까지는 불안할 터, 자칫 인생 끝날까지 불안할 수 있단 생각에 더 불안할 것이다. 이쯤에서 올쏘독스를 처방한다. 하이웨이가 결국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일상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취미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단 체험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여유일 게다.


그래도 길에는 종착점이 있는 법, 바이올린이라는 배움의 길 끝에 파사칼리아를 두었다. 여유를 넘어 사치를 부리고 싶다. 오디오나 라디오가 없었던 그 옛날, 음악은 오로지 연주자에 의해서만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었다. 파가니니는 라이벌 연주자들을 따돌리고 자신만의 청중들을 모으고자 독특한 연주 기법을 개발했다. 요건 못하겠지롱~ 하며 자신만의 ‘특기’를 고안한 탓에 청중은 즐거웠지만 연주자들은 고통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파가니니를 비롯하여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의 3대 고난도 거장들에 의해 개발된 아니 심화된 주법들의 총합이 파사칼리아에 녹아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연주법들의 종합상자라 할까. 단 하나, 왼손 피치카토 주법은 빠져있다. 왼손가락만으로 음도 짚고 동시에 줄도 튕기는 기법인데 생각만 해도 손가락에 쥐가 난다. 얼핏 파가니니의 미소가 보인다. 나의 굳은 손가락으로는 언감생심, 그래서 목표는 찌고이네르바이젠에서 한 단계 낮춘 거다. 취미니까~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 (신지아, 용재 오닐)


사라사테... 찌고이네르바이젠 (신지아/왼손 피치카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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