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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Dec 30. 2019

투게더

내가 미쳤다. 아무리 라면을 먹고 나서 달달한 게 당겼다 하더라도 영화 보면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해치우다니. 맥주가 '목넘김'이 좋다고? 천만에... 수저가 구부러질 정도로 딱딱한 그것을 일단 한번 떠서 입안에 넣기만 하면 그대로 슬슬 녹아 입천장과 혀를 부드럽게 코팅하고 목구멍으로 흘러내리는데, 이 과정이야말로 최고의 목넘김이다.


그 맛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숟가락은 바닥을 긁게 마련이고 영화는 계속되어도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영화를 본 거 같은 느낌? 달달한 여운이 입안에 맴돌아도 살찔 걱정은 살짝 미룬다. 그러다 후회가 밀려올 것 같아 잠시 영화를 멈춤하고 비만의 현장이라도 없애려는데 구겨진 아이스크림 통에서 '투게더'라는 글자가 눈에 밟힌다. 함께 먹는 아이스크림이라는데.


'엄마 아빠도 함께 투게더, 투게더~'


순간 80년대의 로고송이 떠오른다. 아빠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서 투게더 한 통을 보여주니 아이들이 좋아라 손뼉을 친다. 눈 오는 날 저녁이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걸 보면 한겨울인데 아이스크림 광고라... 어쩐지 빙과류가 아닌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더 맛있긴 하다. 여름엔 오히려 먹고 나서 갈증이 더 나는 것 같고 입안도 텁텁하고.


설날에 세뱃돈을 받으면 한 통을 사서 혼자 다 먹었던 기억도 있다. 'since 1974'이니까 올해로 46세, 얘도 옛날엔 호리호리(700cc) 했는데 지금은 후덕(900cc)한 중년이 되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즐겨왔으니 그야말로 우리는 함께 자랐다. 진정한 나의, 투게더... 이후로 티코나 호두마루, 엑셀런트 심지어 장외의 31이나 나뚜루가 유혹해도 의리는 지켰다. 그런 나에게 투게더는 변함 없는 맛으로 화답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브로맨스인가.


어릴 때의 입맛은 수십 년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다 세월의 장벽을 뚫지 못한다. 하나는 망막에 비치고 또 하난 귀청을 울릴 뿐이다. 후각을 자극하며 혀의 수많은 돌기를 하나하나 휘감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때의 맛이 새겨진다. 엄마의 된장찌개, 불고기, 잡채, 칼국수, 오이소박이, 비지찌개 등은 자주 먹어서 그렇고, 아이스크림이나 새우깡 등은 가끔 먹어도 그렇다. 요즘 애들에겐 두 부류의 빈도가 바뀌었지만 이래저래 먹는 건 다 그렇다.


그래서인가 그때의 즐거움에 기대어 스트레스가 쌓였다 싶으면 아이스크림이 생각난다. 어릴 때부터 훈련했던 투게더... 스스로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아이스크림과 함께 짜증과 권태를 녹여 삼킨다. 살이야 찌건 말건 이빨이 썩든 말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는데야. 나에겐 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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